사회구조가 다양하고 복잡함으로 말미암아 영원성의 추구보다는 즉시적인 향락과 안일에 채색되고 습관화된 쾌락적 인간형으로 변모되었다. 이러한 물질적 현실에서 종교가 현대사회에 기능적 적극성을 발휘하기 보다 그 자체를 유지시키려는 지나친 노력으로 말미암아 사회에서 소외되기도 한다. 종교가 본질적인 구원론을 사회에 적응시켜야 함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 구현이 실제적으로 응용되고 보편적 측면에서 현실태로 구현되어야만 그것이 생명의 말씀임과 동시에 구원의 실체로서 존재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 종교속의 장벽은 독선과 편견이다. 자기만이, 자기 가족만이, 우리나라만 잘 되면 그만이라는 절대적 자기주의, 가족주의, 국가주의의 망집에 사로 잡히기 때문이다. 자기가 잘 살려면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조직의 관계성을 이해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들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것들이 과학적인 발전에 영향을 끼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절대적인 의미가 합리적인 현실로 환원되어 버렸고, 이 합리적인 것은 모든 자연현상 사회조직, 경제체제를 인간에게만 유용하게 하려는 인간중심적인 편향으로 치닫고 있다. 이 모든 현상적 존재는 인간을 행복하기 위함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우주 존재의 공존의 윤리를 강조하고 있다. 현상세계의 모든 것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를 불교에서는 연기(緣起)라고 한다. 연기(緣起)란 상관 관계를 의미한다 한 방울의 물이 존재하는 데에는 산소와 수소의 조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수소와 산소가 따로 존재한다면 물이라는 물질이 존재할 수 없다. 우선 개체적인 자아의 순수성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 자아적인 편견으로 조화를 파기할 때 유기적인 관계성은 성립되지 않는다. 윤리적인 선행을 생활의 지표로 삼지 않고 사는 사람들은 악업의 만행으로 행복을 추구한다. 쉽게 말하면 어떤 삿된 행동을 해서라도 돈을 벌겠다는 것이다. 또한 남에게 피해를 주면서도 금품을 획득하여 나의 배만 불리겠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물량적 행복의 생활이 인생의 전부라고 하는 물질위주의 사고방식이 생명의 존재를 외경하고 순응하는 믿음을 방기하기 때문에 생활의 박자가 파괴되었다. 생활 앞에 선제돼야 할 생명은 무엇으로부터 안정되고 해방되는 것인가를 몰각하여 버린 것이다. 우리는 생활의 노예가 되기에 앞서 생명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어디에서 생명의 참모습을 찾아볼 것인가. 자기 생활의 의상이 화려하고, 자기 생활의 음식이 조미롭고, 환락의 관현악이 색정스럽게 울려 퍼져나가도 생명은 짓눌러 방황하고, 고독은삭막한 들판에 방치된 것은 무슨 까닭인가. 생활의 그림자에서 생명의 실체를 발견하는 자기 각성의 문을 열어야 한다. 자기 믿음이 미약한 사람은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믿음과 지식이 함께 갖추어지지 않으면 맹목적인 생활에 빠지게 된다. 인간은 본래 받아온 생명을 청정히 하기 위하여 깨끗한 생활을 해야 한다. 무구하고 청정한 마음이야말로 생명의 근원이다. 이 마음의 참다움이 생명 세계에 실현되는 도덕적 모습의 실천 윤리로 재현되어야 한다. 인간이 살아가는 데에는 취미와 기호가 있어야 한다. 현재는 인간의 마음을 빼앗아간 시대이다. 빼앗아 간 마음의 공간에 물욕과 권력, 관능과 향락의 작태를 반복하지만 그 색상을 탈색하려고 하지 않는다. 권력에 물들면 권력을 남용하고, 물욕에 물들면 치부하려고 몸부림친다. 관능에 사로 잡히면 주색잡기가 다양하게 횡행한다. 타락의 불꽃이 피어 오르면 밤이 가고 날이 밝은 줄 모른다. 오욕악(五慾惡)의 노예가 되어 깊은 수렁에 빠진다. 그러므로 가진자의 향유욕은 난폭해지고 조직적으로 그 대상을 억압한다. 이와 같은 작태를 일소시켜야 한다. 인간은 쉽게 삼독(三毒)의 노예가 되어 일생을 살려고 한다. 탐욕과 노여움, 그리고 어리석음이라고 하는 삼독(三毒)이 뒤섞여 인간의 참모습은 변태적 악물로 변질되었다. 종교는 그것을 바로 잡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