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경북통합이 좌초 위기에 놓였다. 이는 단순히 통합 노력이 중단된 문제가 아니다. 대구경북의 재도약 기회가 흔들리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뼈아프다. 통합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였다. 수도권 일극 체제가 고착화되는 상황에서 대구와 경북이 각자도생으로 버틸 수 있다는 생각은 현실적이지 않다. 행정통합은 규모의 경쟁력을 확보하고, 산업·교육·교통 인프라를 재설계할 수 있는 전략적 선택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 길이 정치적 이해관계에 가로막혀 있다. 일부 정치인들의 욕심과 계산이 지역의 미래보다 앞서는 듯한 모습은 참으로 안타깝다. 특히 통합을 위해 사력을 다해온 이철우 경북도지사에게 사퇴를 요구하는 목소리까지 나오는 현실은 대단히 잘못되었다. 정책의 옳고 그름을 따지고 보완책을 논의하는 것은 필요하다. 그러나 사퇴 요구라는 극단적 방식이 과연 지역 발전에 어떤 울림을 주는가. 용기라 이름 붙인 칼을 함부로 뽑는다고 해서 정치가 성숙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 칼에 베이고 쓰러져 남는 것은 대구경북의 상처와 분열뿐이다. 특히 지역의 지도자를 꿈꾸는 이들이라면 더욱 신중해야 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책임 공방이 아니라 성찰과 연대다. 대구와 경북의 원로·중진·청년
조류학자들은 성격이 가장 고약한 새로 바우어새 수컷을 꼽는다. 수컷 바우어새는 화려한 장식품을 만드는 유일한 조류로 알려져 있다. 나뭇가지와 잎, 열매를 모아 형형색색의 집을 짓고 과일로 색을 칠한다. 암컷을 유혹하기 위한 치밀한 노력이다. 그 모습만 보면 자연의 예술가요, 최고의 로맨티스트다. 그러나 암컷이 짝이 되는 순간 상황은 달라진다. 수컷은 폭군으로 돌변해 암컷을 괴롭히고, 새끼 양육은 모두 암컷의 몫으로 남긴 채 또 다른 짝을 찾아 떠난다. 겉은 화려하지만 속은 공허하다. 결국 수컷 바우어새는 늘 외롭다. 사람도 다르지 않다. 선거 때는 달콤한 말과 화려한 공약으로 시민의 마음을 사로잡지만, 막상 권한을 쥔 뒤 책임을 외면한다면 그것은 리더십이 아니다. 약속은 사라지고, 책임은 희미해지며, 남는 것은 시민의 피로와 불신뿐이다. 방황과 무책임의 종착역에는 언제나 ‘허무’와 ‘후회’의 녹슨 열차가 기다리고 있다. 도시 역시 그렇다. 정치적 리더십이 부재하면 행정은 방향을 잃고, 배는 산으로 간다. 겉으로는 사업이 많아 보여도 중심 철학이 없다면 그것은 표류일 뿐이다. 이제 우리는 묻는다. 민선9기 구미시장 후보에게 바란다. 구미시는 산업도시의 자존심을
지방자치는 시민의 신뢰 위에서 작동한다. 권한은 시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것이며, 그 권한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른다. 이는 어느 시대, 어느 도시에서나 변함없는 원칙이다. 최근 구미시정을 둘러싸고 여러 현안과 논란이 지역사회에서 제기되고 있다. 공연 대관 취소 문제를 비롯해, 상생 협약 무산, 일부 공사 및 행정절차에 대한 의문, 특정 업체 일감 몰아주기 의혹, 축제 예산 과다 편성의 적정성 논란 등 다양한 사안이 시민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사실 여부는 감사와 사법적 판단을 통해 명확히 가려질 사안이다. 그러나 그와 별개로 더 중요한 것은 행정 전반에 대한 시민의 신뢰다. 행정 책임자는 정책의 성과뿐 아니라 비판을 대하는 태도로도 평가받는다. 비판적 보도에 대한 대응 방식, 언론과의 관계 설정, 소통 창구의 운영 여부는 행정의 품격을 가늠하는 기준이 된다. 비판은 불편할 수 있다. 그러나 민주사회에서 비판은 행정을 흔들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바로 세우기 위한 장치다. 이를 포용하고 충분히 설명하는 자세가 곧 책임 있는 행정의 모습이다. 권력은 영원하지 않다. 명예 또한 잠시 머무는 것이다. 결국 시민의 기억에 남는 것은 재임 기간의 화려한 수식어가 아니라,
새 하늘 새 땅 天命之謂性(천명지위성)은 사서 중 하나인 중용의 구절로, 하늘이 하늘의 참 생명을 만물(萬物)에게 부여(附與)한 것이 바로 성(性)이라는 의미의 가르침이다. 성(性)은 모든 사람에게 내재해 있는 하늘의 참 생명이면서도, 나고 자라면서 이렇게 저렇게 서로 다른 성질로 바뀌게 된다. 즉, 성격과 성품으로 굳어지게 된다. 그러나 물이 술이 되고 콜라가 되어도 물의 본질은 그대로 이듯, 성질과 성격 및 성품이 서로 다를 뿐, 그 본바탕인 성(性)은 언제나 변함없이 그대로 여여(如如)하다. 성질과 성격 및 성품의 본바탕인 성(性)이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불성(佛性)이고,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느님이며, 맹자가 말한 양심(良心)이라고 이해해도 무방하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해서 독생자를 주셨으니,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는 구절의 ‘독생자’ 또한 인간 내면의 성(性)에 다름 아니다. 이는 여호와가 네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풀 전능자로, 그가 너로 인해 기뻐하고, 너를 사랑하며, 너로 인해 기쁘게 노래할 것이라는 구절만 보아도 쉽게 납득할 수 있다. ‘여호와가 네 가운데 계시다’는 것이 바로 독생자인 성(性)
성탄절을 맞으며 예수님이 전하신 천국의 열쇠 즉, 복음의 궁극은 무엇일까? 원하는 모든 일을 가장 알맞은 때에 모두 다 이룸으로써 그 어떤 마음의 갈등도 없는 삶, 몸은 건강하고 마음은 편안한 가운데 지복으로 넘쳐흐르는 성공적이고 행복한 삶을, 죽은 후가 아니라 살아서 누리는 것이 복음의 궁극이다.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를 불행 속으로 곤두박질치게 했던, 생각과 말과 행동을 멈추고 크게 죽은 후, 크게 거듭나야 한다. 그렇게 크게 거듭난 뒤에는, 우리를 행복한 삶으로 이끄는 밝고 올바른 생각과 밝고 올바른 말과 밝고 올바른 행동을 하는 새사람이 되어, 새 세상을 이룩해야 한다. 크게 죽어 크게 거듭남으로써 새사람이 되면,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짐으로써, 새 하늘 새 땅이 열린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온몸과 온 마음으로 체득하게 된다. 이처럼 하늘나라는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라, 새 사람으로 거듭남으로써 맞게 되는 것이 새 하늘 새 땅일 뿐이다. 달리 표현하면, 이런저런 대립과 갈등의 삶을 뒤로하고, 안분지족하는 행복한 삶을 누리는 지금 여기가 곧 하늘나라일 뿐이다. 새사람이 되기 위해선, 매 순간 스스
싸우지 않고 이기는 기술 군자유부전(君子有不戰) 전필승의(戰必勝矣) 즉, 군자는 싸우지 않음이 있을 지어전정, 싸움을 하게 되면 반드시 승리한다는 의미의 맹자님 말씀이다. 가장 최상의 삶은 싸우지 않는 것이고, 어쩔 수 없이 싸움을 시작됐다면, 지는 것 보다는 이겨야 더 행복한 것이 우리의 삶이다. 그런데 자신만 이기고 싶은 것이 아니라 상대 또한 싸움에서 이기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단순히 이기고 싶다고 이기는 것이 아니라, 싸움을 승리로 이끄는 기술 등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 겸애(兼愛) 즉,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전한 노나라의 사상가 묵자의 정신을 현대적으로 되살린 중국 고대사 연구가 친위의 ‘싸우지 않고 이기는 기술’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몇몇 기술만 잘 숙지해도 보다 성공적이고 행복한 삶을 앞당기는 것이 가능하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첫 번째 기술은 ‘때와 장소를 가리는 것’이다. 한 겨울 스키장에서는 아무리 비싼 한산 모시라도 별무소용이다. 더운 여름 해수욕장에서는 제아무리 비싼 밍크코트라도 무용지물이다. 바로 때와 장소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두 번째 기술은 ‘아첨하는 이를 곁에 두지 않는 것’이다. 있
군자의 지혜로운 삶 유교(儒敎) 또는 유학(儒學)의 핵심은 바로, 儒(유)를 가르치고 배우는 것에 다름 아니다. 선비를 뜻하는 儒(유) 는 사람을 의미하는 人(인)과 쓰이고 구하고 바란다는 의미의 需(수)를 합한 글자다. 따라서 선비란 이 세상에 없어야 하는 사람도 아니고, 있으나마나 한 사람도 아니다. 꼭 있어야 하는 쓸모있는 사람이 바로 선비로, 달리 표현하면 군자(君子)라고 할 수 있다. 군자(君子)란 요즘 말로 하면, 대중들이 나갈 길을 잃고 우왕좌왕할 때, 올바른 정도(正道)를 제시할 수 있는 지혜로운 ‘리더’ 정도로 봐도 무방할 듯싶다. 이 같은 맥락에서 ‘군자’ 내지 ‘리더’의 선결 요건은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주변의 인연 닿는 모든 사람들이 지혜로운 삶, 성공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등대와 같은 역할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군자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가? 사서의 하나인 ‘중용(中庸)’은 군자의 도에 대해 다름과 같이 설파함으로써, 군자의 삶의 특징이 무엇인가를 간단명료하게 밝히고 있다. “君子之道(군자지도) 辟如行遠必自邇(비여행원필자이) 辟如登高必自卑(비여등고필자비)” 즉, 군자의 도는 비유컨대, 먼 곳을 갈 때는 반
성공의 열쇠 막신일호(莫神一好)라는 말이 있다. 하나를 좋아하는 것만큼 신명나는 일은 없다는 의미다.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한 맹자와 달리 성악설(性惡說)을 주장한 바 있는 중국 주나라 말기 전국시대의 유물론적 유가였던 순자(BC 298년 ~ BC 238년)의 말이다. 순자가 강조한 ‘막신일호’와 동일한 맥락의 가르침인 ‘逐鹿者(축록자) 不顧兔(불고토)’ 즉, 사슴을 쫓는 자는 토끼에게 한눈팔지 않는다는 가르침도 전해진다. 토끼를 쫓는 자 또한 다르지 않다. 토끼를 쫓는다면 사슴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말아야 한다. 오직 하나를 좋아하고 그 하나를 추구해야만 원하는 바를 이를 수 있다. “바늘 끝이 두 개면 옷을 꿰매기가 어렵듯, 마음을 두 갈래로 사용하면 일을 성사시키기 어렵다”는 티베트의 속담도 오직 한 가지 일에 지극정성을 다할 때 원하는 목표를 이루고 성공에 한 발짝 더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을 역설하는 말이다. 누구도 동시에 각기 다른 방향으로 달아나는 두 마리의 토끼를 쫓을 수 없음은 너무나 당연하다. 두 마리의 토끼를 다 잡고자 할지라도, 오직 한 마리의 토끼에 집중해서 그 토끼를 잡은 연후에, 동쪽이나 서쪽으로 도망가는 나머지 한 마리 토끼를 쫓아야
“나 보다 남을 먼저 배려하라”는 말이 있다. 저 자신만 아는 에고 또는 아상(我相)을 타파하기 위한 방편설(方便說)로는 일리가 있는 말이다. 그렇지 않고 이 말을 액면 그대로 생각한다면, 이 말만큼 위선적이고 어불성설인 말도 없다. 내가 있고 남이 있는 가운데, 자신보다 타인을 먼저 챙기고 배려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 짐짓 남을 먼저 배려하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 자신에게 이득이라는 판단이 서면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는 있다. 무조건 우산이나 양산 둘 중에서 어느 하나를 더 사랑하며 애정을 쏟을 필요는 없듯이, 무조건 나보다 타인을 배려할 필요는 전혀 없다. 비가 오면 우산을, 햇볕이 쨍쨍 내려 쬐면 양산을 쓰면 그 뿐, 어느 하나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 넌 센스 듯이, 나 보다 무조건 남을 먼저 생각하고 배려하는 짓도 무늬만 그럴듯한 지독한 위선에 지나지 않는다. 내 발등의 불이 급한데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보다 급하지도 않는 남의 발등의 불을 끄는 것은, 이웃사랑도, 자비의 보살행도 아니다. 정견이 배제된 어리석은 짓일 뿐이다. 이웃이 급하면 이웃을 먼저, 내가 급하면 나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 순리에 맞는 올곧은 행동
2019 기해(己亥)년 가을을 막 보내고 난 아쉬움 때문인지 하늘은 더욱더 높고 청명하며, 꽃들은 더욱더 예쁘고 아름답기만 하다. 하늘이 높고 맑으며 밝은 것은 우리의 마음이 높고 맑으며 밝기 때문이다. 꽃들이 예쁘고 아름다운 것은, 우리의 마음이 예쁘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우리 마음에 높음과 맑음과 밝음이 없다면, 하늘은 결코 높고 맑고 밝을 수 없다. 우리 마음에 예쁨과 아름다움이 없다면, 그 어떤 꽃도 예쁘고 아름다울 수 없다. 心不在焉(심부재언) 視而不見(시이불견) 聽而不聞(청이불문) 食而不知其味 (식이부지기미)라는 가르침이 있다. 마음에 있지 않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으며, 먹어도 그 맛을 알지 못한다는 성현의 말씀이다. ‘처갓집 말뚝을 보고도 절을 한다.’는 속담이 있다. 나에게 마누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하다 못해 밖으로 철철 흘러넘칠 때, 비로소 가능한 일일 뿐, 처갓집 말뚝이 특별나고 대단해서가 아니란 사실은 너무나 당연하다. 이처럼 우리들에게 어떤 마음이 내재해 있느냐에 따라, 즉 그동안 살아오면서 경험한 온갖 기억 뭉치인 업식(業識)에 따라 눈에 보이고 들리는 것이 바로 우리들이 만나는 세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공자님께서는 “無可無不可也(무가무불가야)”를 역설하신 바 있다. 할 만한 것도 없고 불가한 것도 없다는 말이다. 이 세상일에는 반드시 이렇게 해야 된다거나, 또는 이렇게 해서는 절대 안 된다거나 하는 고정된 바가 없기 때문에, 물 흐르듯 상황 상황에 딱 들어맞는 무애 자재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의미다. 맹자는 사서집주를 통해 “孔子可以仕則仕(공자가이임즉임) 可以止則止(가이지즉지) 可以久則久(가이구즉구) 可以速則速(가이속즉속)” 즉, 공자께서는 벼슬을 할 만하면 벼슬을 하고, 그만둘만하면 그만두고, 오래 할 만하면 오래 하고, 빨리 떠날 만하면 빨리 떠나심으로써, ‘무가무불가야’의 삶을 몸소 실천하셨다고 말했다. 벼슬할만하면 벼슬하고, 그만둘만하면 그만둘 수 있는 삶은 주체적이면서도 자유롭고 여유로운 행복한 삶이다. 이와 같은 삶을 가능케 하는 것은 사사로운 욕심을 벗어난 지공무사한 마음이다. 또한 목전의 상황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는 지혜가 뒷받침될 때 비로소 가능한 삶이다. 누구나가 사리사욕을 벗어던지고 ‘머물 때와 떠날 때’를 아는 자유로운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정계 및 재계에서 마지못해 타인에 의해 쫓겨나는 것이 아니
공자님은 말과 관련한 다양한 가르침을 남기셨다. 말은 머릿속의 생각을 타인들에게 전달하는 가장 대표적인 소통의 도구다. 모든 인간은 먼저 생각하고, 그 생각을 말이나 글로 표현한다. 그리고 말과 글로써 자신의 생각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고 판단되면, 온 몸으로 행동하게 된다. 이렇게 인간의 삶은 좋은 일, 나쁜 일, 올바른 일, 그른 일 할 것 없이 신구의(身口意) 즉, 몸과 입과 의식을 통한 행동과 말과 생각으로 이뤄진다. 생각과 말과 행동 중에서도, 인간이 만물의 영장일 수 있는 뚜렷한 특징 중 하나는, 말을 자유롭게 구사함으로써 서로 서로가 원만하게 소통하며 대동단결할 수 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반면, 서로가 서로를 오해하거나, 서로가 서로를 비난하면서 끊임없이 대립-반목하는 것도 말한 마디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 때문에 우리 속담에 ‘아’다르고 ‘어’다르다며 그때그때 상황에 딱 들어맞는 올곧은 말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상황에 맞는 올곧음뿐만 아니라, 입 밖으로 내 뱉어진 말은 반드시 실천돼야 한다. 특히 국민을 이끌고 선도하는 유력 정치인의 경우에는, 자신의 입 밖으로 드러낸 말을 반드시 실행에 옮겨야 하며, 여의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