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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칼럼 = 일본 황족 성씨, 합리적인 의심을 한다

 

 

 

 

칼럼

 

 

         일본 황족 성씨, 합리적인 의심을 한다

 

 

                                                        권우상

                                          사주추명학자. 역사소설가

 

 

일본 tv(朝)news 보도에 따르면 아이코(愛子) 님(様)이 평민 신분으로 적십자사에서 일하게 되었다고 보도했다. 그러면서 기모노(着物 : 전통의상)가 아닌 셔츠를 입고 있는 모습을 공개했다. 아이코(愛子)는 일본 천항의 맏딸(長女)이다. 그런데 성씨가 무엇인지 언급이 없다. 성씨를 밝히지 않는 것은 역대 천황도 마찬가지다. 성씨가 없는 것이 아니라 성씨를 말하면 중요한 사실이 밝혀질 것이 우려해서가 아닌가 싶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역사에 비추어 일본 황족 성씨는 ‘부여’ 씨라고 나는 합리적인 의심을 한다.

 

일본의 새로운 연호 레이와(令和)가 결정되자 아베 전 총리는 당시 레이와(令和)의 의미를 “국민의 단결로 나라 안팎의 평화가 이뤄지며 사람들이 아름답게 마음을 주고 받는 가운데 새로운 국가 발전을 이룩한다.”고 말했다. 일본에서는 세기 이외에 쇼와(昭和)라든지 헤이세이(平成) 등의 연호를 사용하고 있다. 공식적인 서류에서도 서기가 아닌 연호가 사용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역사를 보면 이러한 연호는 일본에서 1300년 동안이나 사용되고 있다. 예전에는 천황이 바뀌거나 큰 사건이 있을 때 연호가 바뀌었지만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천황이 바뀔 때 연호도 새롭게 바꾸게 되었다. 일본 연호를 보면 BC 8000에는 ‘죠몬시대’ BC 300에는 ‘야요이시대’ AD 300에는 ‘야마토시대.’ 593에는 ‘아스카시대’ 710에는 ‘나라시대’ 794에는 ‘헤이안시대’ 1192에는 ‘가마쿠라시대’ 1338에는 ‘무로마치시대’ 1573에는 ‘아즈치 모모야마시대’ 1603에는 ‘에도시대’ 1868에는 ‘메이지시대’ 1912에는 ‘다이쇼시대’ 1926에는 ‘쇼와시대’ 1989에는 ‘헤이세이시대’ 현재 ‘레이와’에 이르렀다.

 

일본측 건국신화를 보면 ‘혼돈의 바다만이 존재했던 가운데 신령이 세상을 창조하기로 마음먹고 많은 남자신과 여자신을 창조했다. 이자나기(남자신)와 이지나미(여자신)이다. 이자나기에게 세상을 창조하라며 보석으로 만든 마법의 창을 주고 이지나미가 창을 휘두르자 일본열도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반면 중국측 기록을 보면 일본은 백제인이 세웠다. 백제 동성왕의 사망으로 왕위에 오른 무녕왕은 개로왕의 아들이며, 곤지의 양자다. 462년 왜(倭)에 있는(현재 奈良縣) 나라백제(奈良百濟)로 가는 도상인 각라도에서 태어났고, 이름은 융이다. 태어난 후 나라백제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일본어로 시마(島) 또는 사마라고 불렀다. 그래서 그를 사마왕이라고도 하였다.

 

중국 대륙과 한반도 외에 왜(倭)에 있는 나라백제는 근초고왕 때 건국되어 당시 근초고왕은 중국 대륙 백제와 한반도 백제와 일본 나라백제를 통치하는 대제국 황제였다. 당시는 해상교통이 발달하지 못한 시대라 왜(倭)의 나라백제를 자치적으로 통치하는 왕을 두어, 이를 천황이라 불렀다. 총독과 같은 개념이다. 사마(島)는 그가 태어나자 생모와 함께 대륙백제로 돌아갔지만 정치적 상황이 불안하여 나라백제에 있는 곤지에게 다시 보내졌다. 이처럼 백제 왕실에서 왕자를 마음대로 왜(倭)의 나라백제에 보내기도 하고 데려오기도 한 것은 나라백제는 백제가 지배하는 영토였기 때문이다.

 

崔在錫 저서 ‘百濟의 大和倭와 日本化 課程’을 보면 백제는 왕자뿐만 아니라 백제의 문물을 왜(倭)의 나라백제에 전파하기 위해 백제 주민을 대거 이주시켰는데 403년(應神 14년) 2월, 백제의 봉의공녀가 대(大) 이주집단으로 나라백제에 건너갔는데 이것이 일본열도에서 의봉(衣縫)의 원조다. 이때 나라백제의 강역은 四國의 섬과 마주보는 本州의 凸처럼 튀어나온 지역인 나라현(奈良縣)의 영역으로 (백제 문제로 표기돼 있어 그대로 표기함) 大和郡, 山市, 奈良市, 天理市, 櫻井市, 高市郡, 御所市, 五條市, 大和高田市, 北葛城郡 등으로 이루어졌다가 關東平野(지금의 東京)까지 확대해 가면서 촌락이나 山川名에 百濟郡 百濟橋, 高麗村 高麗郡, 百濟山, 高麗町, 高麗彌縣, 胡麻, 巨摩, 駒, 小門, 大, 등 백제의 한자를 사용하면서 백제의 문물을 옮겨 놓은 듯한 모습을 갖추었다.

 

나라백제(奈良百濟)의 실질적인 권한을 가진 소아왕(蘇我王)은 665년 3월에 백제의자왕 아들 부여용(夫餘勇)에게 왕권을 물러주었고 한반도 백제가 패망하자 부여용은 왜(倭)로 건너가 나라백제(奈良百濟) 대신들의 추대로 천지천왕(天智天皇)에 올랐고, 그해 9월 ‘다이노사라라(大野讚良)’ 황녀와 결혼했다. 나라백제는 천지천황과 그의 아들 천무천황 대에 오면서 697년 국호를 일본(日本)이라고 하였다. 일본(日本)이란 발음은 백제가 해(日)의 본(本)이 중국대륙과 한반도에서 옮겨졌다는 뜻이다. 왕궁이 백제에서 일본열도로 그대로 옮겨 앉기는 했지만 패망한 백제란 국호를 그대로 사용할 수는 없어 새로운 국호로 日本으로 지은 것이다.

 

강 이름은 百濟川, 마을 이름은 百濟村, 百濟町, 百濟鄕, 百濟縣 등이며 사찰 이름을 百濟大寺, 百濟佛寺, 황궁 이름을 百濟宮, 천황의 시체 안치소를 百濟大賓이라고 불렀다. 나라백제가 국호를 일본으로 바꾸고 천지천황(天智天皇)이 된 사람이 백제 의자왕의 아들 부여 용이었으니 일본 천황은 백제인의 후손임은 분명해 보인다. 그런데 성씨가 없다고 한다. 국왕이 성씨가 없다니 개가 들어도 웃을 일이다. 성씨가 없는 것이 아니라 성씨는 부여 씨인데 성씨가 부여 씨라고 하면 일본은 백제인이 세운 국가라는 사실이 들통나기 때문에 성씨를 감추고 있는 것이라고 나는 합리적인 의심을 하는 것이다. 역사는 신화가 아니라 사실(기록)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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