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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칼럼 = 잠수정 '타이탄'호의 비운

 

 

 

 

칼럼

 

 

                         잠수정 ‘타이탄’호의 비운

 

 

                                                 권우상

                                      사주추명학자. 역사소설가

 

 

보도에 따르면 심해 잠수정 '타이탄'의 탑승자 5명이 전원 사망했다. 잠수 시작 후 연락이 두절된 지 나흘 만에 타이태닉호 뱃머리로부터 488m 떨어진 해저에서 잠수정 잔해물 5개를 발견했는데 내부 폭발로 보인다고 한다. 이 잠수정에는 운영사인 오션게이트 익스페디션의 스톡턴 러시 최고경영자(CEO)와 영국 국적의 억만장자 해미쉬 하딩, 파키스탄계 재벌 샤자다 다우드와 그의 아들 술레만, 프랑스의 해양 전문가 폴 앙리 나졸레가 타고 있었다고 한다. 워치타워 성서책자협회(본부 미국 뉴욕)가 2012년 4월에 발행한 잡지 ‘깨어라!’에 따르면 1912년 4월 10일 타이태닉호가 영국의 사우샘프턴을 출항, 미국 뉴욕으로 향했고 4월 11일에는 프랑스 셰르부르와 아일랜드 퀸스타운(지금의 코브)에서 승객을 태우고 대서양으로 뱃머리를 돌리고 4월 14일에는 저녁 11시 40분경 빙산과 충돌하면서 4월 15일 새벽 2시20분에 타이태닉호가 침몰하여 약 1500명이 목숨을 잃었다면서 어떤 종류의 배였는지 침몰한 원인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북아일랜드 벨파스트에 위치한 얼스터 민속·교통 박물관에 가면 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다. 민속·교통 박물관의 전직 책임자인 마이클 매코건은 타이태닉호가 ‘역사상 가장 유명한 배’라고 말하지만 당시에 타이태닉호만 유명세를 떨쳤던 것은 아니다. 타이태닉호는 벨파스트의 할랜드 앤드 울프 조선소에서 건조한 세 척의 대형 선박 중 두 번째로 만들어진 배였다. 이 여객선은 선체의 길이가 269미터, 폭이 28미터로 당대에 가장 큰 배 중 하나였다. 화이트 스타 해운회사는 그 대형 선박들을 이용해 수익성이 좋은 북대서양 항로를 장악할 계획이었다. 운항 속도에서 경쟁사인 쿠나드 사에 뒤쳐져 있던 화이트 스타 사는 부호와 유명 인사들을 고객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초대형 호화 여객선을 제작하는 데 주력했지만 부유층 외에도 잠재적인 고객이 더 있었다. ‘1900년에서 1914년 사이 매년 약 90만 명에 달하는 이민자들이 미국으로 건너갔다’고 북아일랜드 국립 박물관의 관장인 윌리엄 블레어는 말한다. 유럽에서 미국으로 가는 이민자들은 당시 대서양 노선을 운항하는 여객 회사들에게 가장 큰 수입원이었고 그러한 이민자들도 실어 나를 계획이었다. 타이태닉호의 선장인 E. J. 스미스는 북대서양에 떠다니는 빙산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과거에 올림픽호의 키를 잡고 그 항로를 여러 번 항해한 적이 있었지만 타이태닉호는 대서양을 운항하는 동안 다른 배들로부터 빙산을 주의하라는 경고를 수차례 받았는데도 일부 경고를 무시했다. 또한 어떤 경고는 아예 수신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갑자기 보초를 서던 승무원이 전방에 빙산이 나타났다고 다급히 알렸지만 때는 이미 늦었고 항해사가 급히 방향을 틀어 가까스로 정면 충돌을 피하기는 했지만 배가 빙산의 가장자리를 따라 긁히고 말았다. 그로 인해 선체가 손상을 입으면서 바닷물이 배 앞부분의 구획들로 밀려들기 시작했다. 이내 배가 침몰할 것을 직감한 스미스 선장은 조난 신호를 보내고 구명보트를 내리라고 명령했지만 구명보트 16개와 접이식 보트 4개가 비치되어 있었고, 이 보트들에 최대 약 1170명을 태울 수 있었지만 여객선에는 승객과 승무원을 합해 약 2200명이 타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많은 구명보트가 사람을 가득 태우지 않고 타이태닉호를 떠났다. 게다가 구명보트 대부분이 물에 뛰어든 사람 가운데 생존자가 있는지 찾아보지조차 않아 살아남은 사람은 705명에 불과했다. 타이태닉호가 침몰한 뒤, 여러 나라의 해양 당국자들이 해상 안전을 강화하기 위한 규약을 제정했다. 그 가운데는 승선 인원이 모두 탈 수 있도록 선박에 충분한 구명보트를 비치해야 한다는 규정도 있었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타이태닉호가 매우 빠른 속도로 침몰한 이유가 빙산과 충돌하면서 선체에 커다란 구멍이 생겼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1985년에 타이태닉호가 해저에서 발견된 후, 조사단은 다른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선체가 차가운 바닷물에 닿으면서 강철이 약해져 부서지기 쉬운 상태였다는 것이다. 타이태닉호는 충돌 후 세 시간이 안 되어 두 동강이 난 채 심해로 가라앉았다. 결국 이 사건은 해양 사고 역사상 최악의 참사 중 하나로 남게 되었다.- ‘깨어라!’는 영어, 일본어 등 세계 120개 언어로 발행하는 부수 세계 최다의 잡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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