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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ㆍ예술

권우상 선생님의 명작 동화 = 위대한 대통령 이승만 할아버지 <제2회>

 

 

 

 

권우상 선생님의 명작 동화 = 제2회

 

                         위대한 대통령이승만 할아버지

                              (2)

 

 

우리나라가 북한의 침략으로 바람앞의 등불이 되어 있을 때 이승만 할아버지는 미국으로 날아가 도와줄 것을 간청했습니다. 그러자 미국은 곧 바로 전쟁 물자와 군인 아저씨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다른 나라들도 우리나라를 돕겠다고 나섰습니다. 전쟁을 지휘하는 맥아도 장군님은 인천에 상륙하면서 단숨에 수도 서울을 되찾고 북쪽으로 깊숙이 진격하면서 우리는 빼앗긴 땅을 다시 찾았습니다. 백두산에 태극기가 막 꽂힐려고 할 때입니다.

그런데 중공군라고 하는 중국 군인이 까마귀떼처럼 몰려오면서 아쉽게도 휴전이 되어 눈앞에 다가온 통일을 이룩하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모두 다 빼앗긴 땅을 처음 그대로 되찾은 것은 매우 다행한 일입니다. 이 모두가 이승만 할아버지 덕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은혜를 모르면 안됩니다. 전쟁이 잠시 멈추었지만 북한은 비행기 납치, 무장공비 침투, 간첩 남파, 여객기 테러, 천안함 사건 등 침략의 검은 발톱을 계속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승만 할아버지는 일찍이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에서 대학을 나와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미국사람처럼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 신자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미국에서도 이승만 할아버지의 부탁을 받고 우리나라를 도와 준 것입니다. 이승만 할아버지가 맺어 놓은 미국과의 ‘방위조약’은 오늘날 우리나라가 경제 발전을 이루어 나가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이승만 할아버지는 1875년에 태어나셨습니다. 세종대왕 임금님의 형님이었던 양녕대군의 16대 후손이었습니다. 그러나 5대조 이후에는 벼슬길이 끊겨서 왕족이면서도 가난속에서 자랐습니다. 이승만 할아버지가 태어난 곳은 황해도 평산이었지만 두 살 때 서울(한양)로 이사를 했습니다. 이곳 저곳 옮겨 다니다가 자리 잡은 곳이 남문 밖 도동 골짜기라고 합니다.

이승만 할아버지가 사시는 주변에는 헐벗고 굶주린 백성들이 많았습니다. 이승만 할아버지는 양반에 왕족이었으면서 헐벗고 굶주린 백성들과 친구처럼 살았기에 생각과 느낌은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승만 할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동네 사람들이 신동이 났다며 함께 축하 했습니다. 한문으로 된 시를 가르친 분은 역시 이승만 할아버지의 어머니였습니다.

 

바람은 손이 없어도 나무를 흔들고

달은 발이 없어도 하늘을 건너간다.

 

정말 멋진 글입니다. 이제 막 천자문을 외운 여섯, 일곱 살 꼬마가 자연을 벗삼아 시를 지은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후 이승만 할아버지는 신동이며 천재로 자라났지만 과거 시험에는 운이 없었는지 합격하지 못했습니다. 이승만 할아버지가 과거 시험을 다시 쳤던 어느 해 15만 8,578명의 응시자 가운데 합격한 사람은 겨우 5명이었습니다.

지금도 우리나라에는 ‘입시지옥’이라는 말이 있지만 그 지옥의 역사는 깊고 오랜 것이었습니다. 높은 경쟁률 보다 더욱 힘들었던 것은 이씨 조선 말엽, 과거 시험 자체가 썩을 대로 썩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승만 할아버지와 같이 가난하고 힘없는 젊은이들에게는 희망없는 시험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더욱 이승만 할아버지는 절망하게 했던 과거 시험는 1894년에 역사속으로 사라졌습니다.

‘갑오경장’이라고 하는 새로운 새 시대가 열리면서 과거 시험이 없어진 것입니다. 비록 과거 시험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한문 공부는 물론 ‘사서삼경’이라고 하는 매우 어려운 학문에서 우수한 성적을 보였고, 동양 역사와 한문으로 짓는 시에도 뛰어난 일류 수준의 실력으로 자랄 수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동양과 서양이 운명처럼 만나던 시대였습니다. 시대와 운명은 동양 지식에 뛰어난 이승만 할아버지를 서양으로 이끌었습니다.

이때 ‘배재학당’이라고 하는 학교는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설립된 서양식 학교였습니다. 이승만 할아버지는 이 학교에 들어감으로써 서양(미국)을 만났고 민주주의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기독교를 만났습니다. 당시 ‘배제학당’은 한국 사람, 서양 사람, 일본 사람, 청나라 사람이 다 함께 배우는 국제학교였습니다.

이승만 할아버지는 억울하게 정치범이라고 하는 죄인으로 몰려 한때 감옥에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감옥에서 ‘국제신문’ ‘신학월보’와 같은 신문에 수 많은 글을 남겼습니다. 죄인으로 감옥에 들어갔지만 기독교 신자인 이승만 할아버지는 정치와 종교에 대해서는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로 나라 세우기로 마음 먹고 ‘사람의 공경은 하나님의 기회’라는 성경 말씀적인 믿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승만 할아버지는 당시 조선의 사정을 ‘물이 마르고 흙탕이 되는 고난’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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