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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칼럼 = 인간이 맨처음 시작한 전쟁

 

 

 

 

칼럼

 

 

                             인간이 맨처음 시작한 전쟁

 

 

                                                  권우상

                                        사주추명학자. 역사소설가

 

 

인류 세계에서 발생한 일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망각의 늪으로 빠져들기 마련이다. 그래서 기록으로 남기고자 하는 것이 역사(history)이다. 언제부터 정치를 했는지는 명확한 기록이 없다. 그러나 전쟁을 시작한 기록을 보면 정치의 시작도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인류가 맨 처음 시작한 전쟁은 언제였을까? 페르시아 쪽 학자들의 설에 따르면 다툼(전쟁)의 원인이 된 것은 페니키아 인(人)이었다고 것이 정설로 되어 있다. 헤로도토스의 저서 ‘역사’의 기록에 따르면 페니키아 인이 홍해(紅海)에서 그리스 쪽으로 바다로 옮겨와 정주했다고 한다. 그뒤 원양 항해를 떠나 이집트나 아시리아의 화물을 싣고 곳곳을 돌아다녔는데 아르고스에도 왔다고 한다. 그 시절 아르고스는 오늘날 헬라스(그리스)라고 불리는 지역의 나라들 가운데서 가장 강대한 나라였다. 페니키아 인들은 아르고스에 도착하자 싣고 온 화물을 팔아치웠다. 도착한지 5, 6일 되던 날 상품도 거의 팔렸을 무렵에 많은 여자들이 해안으로 몰려 왔다. 그 중에는 왕의 딸도 있었다. 왕녀의 이름은 왕 ‘이나코스’의 딸 ‘이오’였다. 여자들은 배 뒤 근처에 서서 저마다 물건을 사고 있었는데 이때 페니키아 인들이 서로 눈짓을 주고 받더니 여자들에게 덤벼 들었다. 여자들은 도망쳤으나 왕녀 ‘이오’는 다른 몇몇 여인들과 함께 붙잡혔다. 페니키아 인은 이 여자들을 배에 태우고 이집트로 갔다. 이 사건이 있은 뒤 몇 명의 그리스 인이 페니키아의 티로스의 왕궁에 침입하여 왕의 딸 ‘에우로페’를 납치해 갔다. 이렇게 해서 서로 피장파장이 되었다.

 

그런데 그 뒤 이번에는 그리스 인들이 군선을 타고 콜키스(흑해 동쪽 해안의 지방 이름) 지방의 아이아로 가서 파시스 강(江)에 이르러 왕녀 ‘메디아’를 그 땅에서 납치해 갔다. 콜키스의 왕은 그리스로 사자를 보내 왕녀 납치에 대한 보상과 함께 딸을 돌려 보내라고 요구하였다. 그런데 그리스 쪽에서는 당신네도 ‘아르고스’의 왕녀 ‘이오’를 납치하고도 보상을 하지 않았으므로 이쪽(그리스)에서도 보상하지 않겠다고 대답했다. 그뒤 콜키스 왕은 아들인 ‘프리아모스’에게 왕권을 넘기자 ‘프리아모스’는 왕위에 올랐다. 그러자 ‘프리아모스’ 왕은 그리스에서 자기 아내가 될 여자를 납치해 오라고 사자를 보냈다. 사자는 ‘헬레네’를 납치하였다. 그리스는 ‘프리아모스’ 왕에게 사자를 보내어 납치된 ‘헬레네’를 돌려 보내 달라고 요구하면서 보상도 요구했다. 그러나 ‘프리아모스’ 왕은 ‘헬레네’를 돌려주지 않고 보상도 하지 않았다. 여기까지는 양쪽이 서로 여자를 납치하면서 보복을 한 셈이 되었다.

 

하지만 그리스는 군대를 진격시키면서 두 나라는 전쟁을 하게 되었고, 프리아모스의 나라는 멸망되었다. 이것이 최초의 전쟁이라는 것이 헤로도토스의 저서 ‘역사’의 기록이다. 결국 이 전쟁의 원인은 왕녀를 납치한 데서 일어난 사건이지만 페르시아 인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페니키아 인이 ‘이오’를 납치해서 이집트로 데려간 것이 아니라 알고스에서 그 배의 선장과 성관계를 맺은 것이 임신이 되자 ‘이오’는 자기가 임신한 것이 부모를 대하기가 부끄러워 자진해서 페니키아 인과 같은 배를 타고 도망쳤다는 것이다. 이 전쟁 이후 페르시아는 그리스를 적(敵)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페르시아 인은 아시아에 사는 비(非) 그리스 여러 민족을 자기들에게 소속되는 것으로 간주하고 유럽과 그리스는 자기들과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향후 두 나라의 전쟁을 예고하는 대목이다. 그후 그리스와 페르시아는 전쟁을 하였다. 여기까지가 헤로도토스 ‘역사’의 기록이다. 헤로도토스(Herodotus)는 방대한 분량의 고대 역사를 기록한 불후의 명작 ‘역사’를 남겼다. 그의 저서는 세스토스가 함락된 때인 기원전 479년으로 페르시아 전쟁은 종결되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전쟁의 원인은 어느 한 나라가 어떤 형태든지 피해를 보게 되면 이에 대한 보복의 차원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전쟁은 어느 한 쪽이 굴복하고 복종하여 희생을 감수하거나 아니면 노예적인 생활을 하지 않는 한 불가피 하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전쟁은 보복의 연속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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