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權禹相) 장편 역사소설 제3부 제73회
다라국의 후예들
그런 다음에 부성지는 취중인 척하고 이집 저집의 문벌이 어떻다는 것을 저울질하다가는 은근히 고팔배의 가난함을 들추어 내어 모닥불을 지폈다.
“그러니 말일세, 본래 집안이 대대로 가난했으니 딸의 혼사에도 잘 사는 집으로 보낼 수 있겠나, 자네에게 좋은 수가 있네, 자네 과년한 딸이 있지 아니한가, 그 딸 가지고 그림 잘 그리는 사위 하나 얻어 보려나 어때?”
“아, 이 사람이 미쳤나, 졸지에 그림 잘 그리는 사위는 무엇이야? 그리고 그림 잘 그리는 놈이 무엇 때문에 가난한 내 집 딸을 데려 가려구 한다든가?”
“그럼 달라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주기는 할텐가? 어서 대답해 보게.”
“그것은 그때 보아야지.”
“그럼 이 좌석에서 당사자가 있으니 승낙을 하게, 바로 저 서운세 말일세, 나이는 이제 마흔 셋, 풍체 좋고 그림 잘 그리는 화가 어때, 자네 집 선대에서 이런 화가가 있었든가? 이 혼인만 하면 꽃이 활짝 피었네, 꽃이 활짝 피었어, 두 말 말고 그렇게 하게나.”
이 때에 좌중에 않았던 여러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모두가 깜짝 놀랐다. 심지어 부성지를 광인(狂人)으로까지 생각했다. 그러나 오직 고팔배만은 놀라거나 분노하는 기색이 없이 싫다 좋다 말이 없이 입을 다물고 있었다. 이것을 본 양성지는 대답을 재촉했다.
“어서 대답을 해 보게 왜 말이 없는가?”
“좀 더 생각해 보아서 후일에 기별 하겠네.”
그렇게 말하는 고팔배는 아주 싫지도 않은 눈치였다. 사실 따지고 보면 자기처럼 가난한 집으로서는 부자집과 혼사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 겨우 십 칠세 된 딸을 마흔이 넘은 홀애비에게 그것도 두 번이나 상처(喪妻)한 홀애비에게 삼취(三娶)로 시집을 보내는 일은 너무도 미안한 일이니 자기 아내와 한 번 의논한 후에 결정하려고 했다. 고팔배가 집으로 돌아와서 술이 깬 다음에 아내에게 이 말을 의논하였다. 그러자 아내는 펄펄 뛰며 거절했다.
“그 무슨 소리요, 재취도 아니고 삼취로 딸을 시집 보내다니 말이나 되는 소리요.”
그림 잘 그리는 화가(畵家) 사위를 두는 것도 좋으나 마흔이 넘은 홀애비 사위가 마음에 꺼리던 차에 아내의 반대를 당하고 보니 굳이 고집할 수도 없어 고팔배는 부성지에게 혼인을 거절하는 서찰(書札)을 보냈다. 그리고 불과 한 달이 못되어서 고팔배의 딸은 그 시골에서 수십 리 되는 곳에 혼인을 정했다. 혼인 날이 되자 고팔배의 집 마당에는 채색차일을 구름 같이 높이 치고 빈객들이 들끓었으며, 산해진미(山海珍味)가 산더미처럼 쌓여 제법 큰 잔치 분위기였다. 그런데 초례 시간이 다 되었는데도 신랑이 나타나지 않았으며, 얼마를 더 기다려도 역시 종무소식이었다. 초조한 기색이 신부댁을 어지럽히고 있는데, 얼마 후에 하인 몇 사람이 오더니, 사랑채 마당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무슨 말을 했는지 주인을 비롯하여 온 식구가 모여서 수군수군하며 얼굴에 대단히 당황한 빛이 보였다.
이 때에 양성지도 연석에 참례하였다가 이 모양을 보고 비록 남이라도 한 동네에 살며 절친한 사이였으므로 집안끼리 수군대는 곳을 뚫고 들어가 그 까닭을 알아 보았다. 고팔배를 비롯하여 모두가 얼굴이 흙빛이 되고 경황이 하나도 없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