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럼
日本의 僞史 造作 ‘任那經營說’
권우상
명리학자. 역사소설가
일본에서는 지금까지도 4세기 후반에 大和政權이 大軍을 내어 거의 2세기 동안 韓國의 남부지방을 지배하였다는 것을 기정 사실로 하여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크게 취급하고 있다. 그러한 것의 하나가 ‘日本을 지키는 國民會議’가 편찬한 ‘新編日本史’이다. 그 내용 중에 ‘任那經營說’이 아래와 같이 되어있다. “大和朝廷은 半島의 鐵 資源이나 선진기술 등을 확보하기 위해 4세기 후반경 朝鮮의 낙동강 하류의 가라(任那) 지방에 진출하여 거점을 두었다. 고구려 好太王(광개토왕) 碑文에 倭人이 百殘(百濟), 新羅에 대하여 우월권을 둘러싸고 391년에서 404년에 걸쳐서 高句麗와 교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리하여 朝鮮半島까지 세력을 넓히고 있던 大和朝廷은 5세기에 이르러서는 중국의 南朝(宋. 齎)와도 적극적인 외교를 전개하였다. 宋書 ‘倭國傳’에 의하면 讚. 珍. 濟. 興. 武의 倭王은 宋이나 齎에 사신을 보내어 조선제국에 대하여 군사지휘권을 갖는 것을 의미하는 높은 작호를 얻으려고 하였다.”
일본이 ‘任那經營說’을 기정 사실로서 定說을 내세우게 된데는 고구려의 광개토왕 碑文에 있는 한 줄의 글이 결정적인 근거 자료가 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광개토왕은 고구려 제19대 왕으로서 정식 시호는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인데 이를 줄여 廣開土王 또는 好太王이라고 하고 그의 년호를 따 永樂大王이라고도 한다. 재위 기간은 AD91(辛卯)부터 AD412년(壬子)까지로서 百濟의 아신왕. 倭의 讚王(應神天皇)과 같은 시대다. 광개토왕이 죽자 AD414년 그의 아들 장수왕은 父王의 공적을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높이 6.3m가 되는 거대한 자연석에 1800여 자의 글자를 새겨 건립했다. 이 碑文이 일본에서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883년에 南滿洲 각지를 다니며 첩보활동을 하던 일본육군 참모본부의 사고우(酒尼) 중위가 그 碑文을 일본에 가져와서부터다.
그 碑文에는 “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濟OOO羅以爲臣民”이란 구절이 있는데 일본 학계에서는 이를 “倭가 辛卯年(AD391) 바다를 건너와서 百殘(百濟)OO, 新羅를 쳐부수고 臣民으로 삼았다” 이렇게 해석하여 ‘任那經營說’을 뒷받침 하는 근거 자료라고 믿었다. 일본으로서는 이런 광개토왕 碑文이 韓半島 지배에 대한 근거 자료로 주장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증거였던 것이다. 모든 史料가 있는 그대로 다 진실일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대하는 많은 史料 가운데는 僞作, 造作, 捏造의 是非 대상이 되었던 것이고 지금도 학계에서는 이 문제가 논란이 되고 있다. 특히 古代 韓日關係史에 있어서 시시비비를 가려야 할 많은 현안 중의 하나가 광개토왕 碑文에 새겨진 ‘辛卯年의 倭’인 것이다. 그런데 삼국사기 진사왕편을 보면 辛卯年에는 왕이 大島(강화도)에 나갔고 역시 그해 拘原(경남 김해)에서 사냥(실은 전쟁을 숨겨 표현 한 것)을 하였다.
그러나 왕이 돌아오지 않아 신하들이 찾아보니 拘原의 行宮에서 사망한 사실이 밝혀졌다. 진사왕이 拘原 行宮에서 사망한 것은 應神天皇 3년편에 있는 紀角宿彌가 진사왕을 공격한 것과 관계가 있다. 따라서 광개토왕 碑文에서 장수왕이 말하는 ‘辛卯年의 倭’는 應神天皇이 보냈다고 하는 紀角宿彌을 지칭한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당시 倭에는 근초고왕이 세운 那良百濟가 있었고 應神은 근초고왕이 임명한 那良百濟를 통치하는 천황(총독격)이었다. 應神天皇은 紀角宿彌와 공모하여 진사왕을 살해할려고 紀角宿彌을 任那에 보내 진사왕을 살해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辛卯年의 倭’라는 것은 辛卯年에 紀角宿彌(倭人)이 왔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紀角宿彌는 침류왕의 아들인 아신왕과 사촌형제간이라 권력쟁탈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이런데도 일본은 광개토왕비에 적힌 ‘辛卯年의 倭’란 글자를 마치 일본이 한반도를 지배했다며 ‘任那經營說’을 그 근거로 내세우는 것은 개탄을 넘어 분노가 치민다. 鹿島昇氏은 ‘倭와 辰國’에서 다음과 같이 단언하였다. “역사는 위조 가운데서 가장 큰 것은 국가의 위조다. 실제로 위조된 국가의 모델이었다. 이를 테면 日本의 銅鐸時代의 倭國 歷史를 지을 때 조선반도의 百濟史를 빌어서 王名을 바꾸어 써 놓고 내용을 소설풍으로 하여서 百濟史를 倭史로 조작해 놓은 수법이다. 이것은 당시의 지배자나 史官이 백제계였으므로 여기에서는 이민 온 자들이 이민지의 史書로 변조하는 단순한 수단이 취해진 것이다. ‘倭와 辰國’ 新國民社 刊 p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