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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칼럼 = 광복절에 되돌아 보는 대동아공영권

 

 

 

 

칼럼

 

 

          광복절에 되돌아 보는 대동아공영권

 

 

                                                          권우상

                                         사주추명학자. 역사소설가. 극작가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은 쇼와시대(昭和時代) 일본제국 정부와 일본군에 의해 창안되었다. 점령지의 아시아인들에게 동아시아보다 더 큰 영역에서의 동북아시아, 동남아시아, 오세아니아의 문화적, 경제적 통합이라고 선전된 개념이며 “일본에 의해 주도되고 서방세력에 독립된 자급자족적인 아시아 각국의 군사적, 경제적 동맹 블록”을 만들고자 하는 욕망을 표현한 것인데 당시 일본의 외무대신 아리타 하치로(有田八郞)가 1940년(6월 29일)에 라디오 연설을 통해 “국제 정세와 일본의 위치”란 제목에서 선언했다.

 

즉 ‘대동아’란 말은 1940년에 나왔으며 그 전(1939년)에는 ‘동아신질서(東亞新秩序)’라고 했다. 중국, 인도가 동남아의 문화중심국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일본이 서양의 신문명을 받아들이면서 동아시아에서 문명국으로 부상하자 중국, 인도 등을 야만국으로 여기게 되었고, 서구 제국주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워져 번영과 평화, 자유를 누릴 아시아 국가들의 ‘공영(共榮)’을 찾기 위해 새 국제질서를 만드는 것이었다. 청~일전쟁은 여기에서 발발한 것이다. 즉 중국 시장에서의 일본의 공식적인 잇점을 확보하기 위한 시도로 중국을 처음 침략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 서구의 식민통치를 당한 많은 주민들이 일본에 동감하던 대동아공영권 내부의 다른 국가들(인도네시아 등)은 전쟁 초기에 점령되었고, 대동아공영권의 나머지는 만주국처럼 이미 일본의 통제하에 있었다. 대동아전쟁은 일본제국과 미국, 영국, 네덜란드, 소련, 중국 등의 연합국과의 사이에 발생한 태평양전쟁에 대한 일본정부의 명칭을 말한다. 이 명칭은 1941년 12월 12일에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내각이 지나사변(중일전쟁)을 포함하여(일본인들은 중일전쟁을 지나사변(支那事変)이라 함) 대동아전쟁이라고 결정한데서 비롯됐다. 그러나 패전 후에 연합군 최고사령부에 의해 전시 용어로 사용이 금지되었으며, 태평양전쟁으로 단어가 바뀌어 사용되었다. 대동아전쟁과 태평양전쟁은 같은 말이다.

 

중일전쟁(中日戰爭)은 1937년 7월 7일 일본제국의 중국대륙 침략으로 시작되어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계속된 중화민국과 일본제국 사이의 대규모 전쟁이다. 이 전쟁은 20세기 아시아 최대 규모의 전쟁이었다. 전쟁의 양상을 보면 1931년 후에는 간헐적으로 두 나라의 교전이 있었지만 전면전은 1937년 이후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일본이 연합국에 항복하자 1945년 9월 2일 종료되었다. 1914년 유럽 및 중동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일본은 영국과 동맹을 맺고 동맹국에 가담하여 참전했다. 그 속내는 동아시아 지역에 있어서의 일본의 지위를 더 높이고 국제적인 발언권을 강화할 목적이었던 것이었다. 일본은 독일에 선전포고하고, 독일령이었던 중국 산동반도의 교주만과 독일령 남양군도를 점령하였다. 산동반도를 점령한 일본은 1915년 1월 중국에 대해 만주와 산동반도 등에 대한 일본의 이권을 반영구화하고 남만주와 내몽골 일부를 일본에 조차하는 것을 요지로 하는 21개의 특혜조건을 요구하였고, 중국은 같은 해 5월 이를 수용하였다. 이와같이 중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행위는 배일(排日) 운동인 5·4 운동(1919년)에 밀려 실패하였다.

 

이 무렵 러시아(차르정부)는 아시아에 대한 영향력 확대로 만주를 점령할 생각을 갖고 압록강 하구에 러시아 해군기지를 건설하려고 하였다. 이것이 영암포사건이다. 이러한 일련의 러시아 행위, 즉 시베리아 철도와 각종 해군기지 건설은 러시아의 한반도 침탈 정책의 일환이었다. 이때 러시아는 전쟁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지구 반대편의 군대를 극동아시아로 보내는 것이 쉽지 않은 문제라 주저하고 있었다. 일본측 기록에 따르면 러시아가 한반도를 차지하면 일본은 자국 안보에 심각한 타격을 우려하여 러시아를 선제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했다. 러~일전쟁은 결코 소규모 전쟁이 아니었다.

 

러시아는 이 전쟁에 총력을 기울였고, 세계 각국은 러시아의 승리를 예상했었다. 다만 미국은 부패가 심각한 러시아 패전을 예측했다. 전쟁이 막판에 접어 들자 육전에서 가장 치열한 봉천(203고지)전투에서 러시아는 무너지고 최강을 자랑하던 러시아 발트함대는 일본함대에 참패당하는가 하면 러시아 태평양 함대 역시 전멸하자 러시아는 항복했다. 패전의 원인 중에 가장 중요한 문제는 크로파트킨 같은 무능한 지휘관과 부패 등으로 지적됐다. 러~일전쟁에 참전한 러시아 군의관 ‘비껜찌 베레사예프’의 저서 ‘러일전쟁 군의관’에 따르면 러시아 군용물자와 의약품은 멀리 떨어진 만주전선에 도착하기전 이미 절반 가량은 없어졌다고 기술하고 있다. 러시아 부패의 심각성을 알수 있는 대목이다. 이런 나라가 패배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하지 않는가? 만일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승리했다면 한반도는 러시아 영토가 되었을 것은 자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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