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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칼럼 = 양철북과 에피쿠로스의 행복론

 

 

 

 

칼럼

 

 

                     양철북과 에피쿠로스의 행복론

 

 

                                                             권우상

                                                사주추명학자. 역사소설가

 

 

노벨문학상을 수상(1992년)한 귄터 그라스의 ‘양철북(Die Blechtvommel)은 독일 전후 문학을 대표하는 소설이다. 단치히를 무대로 독일전쟁이전 바이마르 시대와 나치시대, 그리고 제2차세계대전의 격동기를 거쳐 전후시대를 배경으로 세 살 때 성장을 멈춘 주인공 오스카는 난쟁이의 삶을 통해 소설로 그려낸다. 성장을 멈추게 된 것은 어른들의 세계로 대표되는 기존체계에 대한 반항과 거부로 지하실에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양철북을 두드리고 괴성을 지르면 유리창이 깨어지는 초능력으로 그의 반항의식을 드러낸다. 여행지에서 발견한 장난감 양철북을 두드리는 어린이, 어른들에겐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반항적이고 고집스런 모습이 매우 우직할만큼 순진한 독자적 시점을 전후 독일문학에 큰 영향을 가져다 주게 된다.

 

세 살때 성장을 멈추고 정신병원에 입원한 오스카는 그런 시대에 유아성을 체험하고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을 사람들 앞에 들어낸다. 그를 둘러싼, 선량하지만 약아빠지기도 한 소시민 생활속에 나치즘이 자연스럽게 침투해가는 광경이 북의 리듬에 맞춰 기억 밑바닥에서 솟아 나오고 있다. 무엇보다도 충격적인 것은 그것을 외부에서 오는 악(惡)이 아니라 일상속에 묻어 있는 기괴함, 잔혹함, 그리고 현실과 분리할 수 없는 난잡함으로 보는 그런 관점이다. 커다란 네 겹의 치마 아래에서 이루어진 정사(情事), 오스카의 어머니와 얀 브론스키의 불륜, 오스카의 스승이 된 그레프 미망인의 질척한 성(性), 애인 마리아와 아버지 마체라트가 대낮에 벌리는 정사를 목격한 오스카, 전쟁으로 공습 때 지하실에서 서로 뒤엉키는 두 난쟁이 오스카와 로스비타와 간호사의 양복장 안에서 하는 자위행위, 야자 융단으로 괴롭힘을 당하면서 간호사가 느끼는 기묘한 쾌감, 결벽이 있는 사람들에게 빈축을 살만한 ‘성의 영역’들을 보면 인간의 삶이 얼마나 추악한 것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나는 여기에서 한 가지 의문을 던진다. 인간은 왜 이렇게 추악하게 사는가? 어차피 죽는 인생이라면 좀 더 아름답게 깨끗하게 살 수 없을까? 그러나 여기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답변은 “어차피 죽는 인생이라면 살 때 마음껏 즐기다가 죽는다”라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것이 행복이라고 말하는 사람에게는 나로서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인간의 소망은 행복이기 때문이다. 행복론의 위대한 교사인 에피쿠로스(그리스의 철학자)는 인간의 욕구를 세 가지 항목으로 나누었는데 이는 아주 뚜렷하고 적절한 구분이라는 것이 쇼펜하우어의 말이다. 여기에 따르면 첫째 항목은 자연적이고 없어서는 안될 욕구이다. 이 욕구가 채워지지 못할 때에는 고통이 일어난다. 의식주가 여기에 포함되어 있으며 이는 만족되기 쉬운 것이다. 둘째 항목은 자연적이기는 하지만 없어도 상관없는 욕구로 성욕이 여기에 해당된다. 셋째 항목은 자연적인 것도 꼭 필요한 것도 아닌 욕구이다. 사치, 낭비, 화려함, 영달을 바라는 것이 여기에 해당된다. 이는 한이 없고 이것을 만족시키는 것은 아주 곤란하다는 것이다. 즉 인간이 행복을 추구하는 데는 의식주 욕구, 성욕, 사치욕이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그런데 쇼펜하우어가 이렇게 말한 욕구는 각자의 범위 안에서 움직인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한계 내부에 가지기를 바라는 어떤 대상이 있고 이것을 획득할 희망이 있으면 행복을 느끼지만 어떤 장애로 이 희망을 빼앗기면 사람은 불행함을 느낀다. 그러나 이 한계 밖에 있는 사람에게는 전혀 작용하지 않기 때문에 부자의 많은 재산도 괴롭히지 않는다. 다른 한편으로 부자도 가지고 싶은 것이 있을 때에는 그가 이미 소유한 많은 것을 통해 위로 받지 못하는 것이다. 부귀는 바닷물과 같아서 마시면 마실수록 갈증을 더 느낀다.” 그러면서 “불만의 원천은 욕망의 양을 크게 하려고 되풀이 해도 그것을 가로 막는 다른 것이 움직이지 않고 버티고 있는 데에 있다.”고 하면서 “인간처럼 가난하고 온갖 욕구로 이루어져 있는 종족에게는 재산이 무엇보다도 존중되고 숭배되며, 권력마저 재산을 만드는 수단이라 여겨도 이상할 게 없고, 돈을 벌기 위해서는 다른 모든 것이 제외되고 묵살 되어도 놀랄 것이 없으며 사람의 소망이 오로지 돈만을 바라보고, 다른 무엇보다 돈을 사랑하며, 사람들은 흔히 비난을 받지만 재산은 단지 한 가지 소망, 한 가지 욕구를 채우는 데 지나지 않으며, 음식은 배가 고픈 사람에게만, 포도주는 건강한 사람에게만, 약은 병자에게만, 가죽은 겨울에만, 여자는 젊은이에게만 좋은 것처럼 이 모든 것들은 오직 일정한 목적을 위한 재산이다. 그러나 돈은 절대적인 보배로서 단 한가지 욕망에 대해 구체적으로 충족해 줄 뿐만 아니라 사람의 모든 욕구를 채워준다.”고 말한다. 소설이 비록 허구라고는 하지만 여기에는 다양한 삶의 모습들이 녹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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