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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칼럼 = 애국선열 추모하고 나라 사랑하자

 

 

 

 

 

칼럼

 

 

             애국선열 추모하고 나라 사랑하자

 

 

                                                                 권우상

                                                    사주추명학자. 역사소설가

 

 

전쟁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대한민국은 전쟁의 산물이다’라고 말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냉전이 없었다면 한강의 기적도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탄생한 대한민국은 오늘날 세계에서 소득수준 8위의 국가가 되었다. 여기에다 교육과 의료수준에서도 세계적인 수준이다. 불름버그 혁신지수에 따르면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혁신적인 국가로 선정되기도 했다. 세계사를 보면 국가의 탄생과 소멸은 대부분 전쟁을 통해서 성립진다. 소멸되는 국가는 싸울 힘이 약한 쪽이 된다. 한국전쟁으로 전세계가 한반도에 관심을 두고 있을 때 중국이 티베트를 침공하여 합병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한반도의 38선 분활은 제2차 세계대전을 종결하기 위한 카이로, 얄타, 포스담 회담에서 거논되지 않았다. 1943년 11월 23일 카이로 회담에서 ‘적절한 절차에 따라 한국의 자유독립이 약속됐고, 이후 이를 재확인 했을 뿐이다.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명분으로 38선을 경계로 미국의 군정이 실시됐다. 8월 25일 민간인 왕래가 차단되고 전화와 우체국 철도운행도 금지됐다. 각 도청 소재지를 우선 점령한 소련군은 8월 29일 북한 전역을 점령했다. 9월 6일 해주-서울간의 전화가 단절된 것을 마지막으로 38선은 고정된 남북의 분단선으로 자리 잡았다. 남한은 선거에 의해 이승만 대통령의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북한은 1948년 김일성을 수상으로 추대하고 박헌영을 부수상으로 삼아 ’조선인민공화국‘을 수립했다.

 

북한정권은 추가적인 유엔 관할의 총선거도 외면하고, 오직 공산화를 위해 기반을 깔아 놓았다. 1949년 6월 29일 주한미군이 철수했다. 그러자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괴군은 ‘폭풍’이란 작전명으로 38선 전역에서 남침을 개시했다. 북한군은 소련제 최신형 탱크를 242대 가지고 있었고, 1,700여 대의 전투기를 포함하여 200여 대의 비행기를 갖고 있었다. 북괴 병력은 20만 명을 넘었다. 반면 한국군은 탱크와 전투기는 전무했고, 20여 대의 훈련용 연습기와 연락기가 전부였다. 북괴군은 남한 전역을 점령했고, 한국군은 낙동강을 최후의 방어선으로 부산과 포항지역만 수비하고 있었다. 남한이 공산화되는 순간이었다.

 

미국은 유엔안보리를 열어 한국군 파견을 의결했다. 미국을 주축으로 오주, 캐나다, 영국, 필리핀, 태국, 터키 등 유엔군으로 참전한 나라는 전투참가 16개국, 의료지원 5개국, 물자지원국 등 63개국이다.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 작전 성공으로 서울을 탈환했고, 북괴군은 북으로 퇴주하자, 계속 북진하여 백두산에 태극기를 꽂을 순간이었다. 그런데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로 유엔군은 후퇴해야 할 상황이었다. 1,129일간의 전쟁으로 입은 피해는 국군 62만명, 유엔군 16만명, 북괴군 94만명, 중공군 100만명, 민간인 250만, 이재민 370만명, 전쟁미망인, 30만명, 전쟁고아, 10만명, 이산가족 1000만명으로 당시 남북한 인구 3,000만 명의 절반을 넘은 1,700만명이 피해를 입었다. 남한의 전 국토가 공산화 되고, 마지막 남은 부산,포항을 남겨 놓은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목숨을 던져 싸워 조국을 지켜준 애국선열들에게 우리는 그 은혜를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현충일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6·25 참전용사들과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고 기념하기 위해 지정된 국가기념일이다. 1953년 9월 29일 동작구 동작동에는 6·25전쟁 중 순직한 국군장병들을 안치하기 위한 국군묘지의 설치가 확정되었다. 1955년 7월 15일 국군묘지관리소를 발족하고, 이듬해 4월에는 ‘국군묘지설치법’을 제정해, 군묘지의 운영과 관리를 제도화했다. 이 과정 중, 4월 19일에는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을 개정하여, 6월 6일을 ‘현충기념일’을 공포하게 되었다. 이날은 통상적으로 ‘현충일’로 불리다가 1975년 12월부터는 공식적으로 ‘현충일’로 개칭되었다. 옛부터 손이 없다는 청명과 한식에는 각각 사초와 성묘를 하고, 6월 6일 망종에는 제사를 지내는 풍습이 있었다. 기록을 보면 고려 현종 5년 6월 6일에는 조정에서 장병의 뼈를 집으로 봉송하여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과거 농경시대에서는 보리가 익고 첫 모내기가 시작되는 망종을 길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1956년 현충일 제정 당시 정부가 6월 6일을 현충일로 정했다고 한다. 한국전쟁 당시 사망한 전사자를 추모하고 기념하려는 의도에서 정부가 국민의 안보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현충기념일과 6월 25일 한국전쟁을 연계해서 6월을 호국보훈의 달로 정함으로써 순국선열과 전몰장병을 추모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헌충일을 맞이하여 우리 모두 애국심과 순국선열을 추모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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