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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權禹相) 칼럼 - 일본 의봉(衣縫) 원조는 백제인

 

칼럼

 

 

                            일본 의봉(衣縫) 원조는 백제인

 

 

                              

                                                    권우상

                                          명리학자. 역사소설가

 

 

 

백제 동성왕의 사망으로 왕위에 오른 무녕왕은 개로왕의 아들이며 곤지(困支)의 양자이다. 462년 왜지(倭地)에 있는 나라백제(奈良百濟)로 가는 도상인 각라도(各羅島)에서 태어났고, 이름은 융()이다. 태어난 후 줄곳 나라백제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일본어로 시마() 또는 사마라고 불렀다. 그래서 그를 사마왕(斯麻王)이라고도 하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중국 대륙과 한반도 외에 왜지에 또 하나의 백제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나라백제이다. 나라백제는 근초고왕 때 건국되었는데 당시 근초고왕은 대륙 백제, 한반도 백제, 왜지의 나라백제 세 지역을 통치하면서 대제국 황제였다. 대륙에서 한반도는 거리가 가깝지만 왜지는 대륙에서 거리가 멀고 당시는 해상교통이 발달하지 못한 시대라 왜의 나라백제를 자치적으로 통치하는 왕을 두었는데 이를 천황이라 불렀는데 총독과 같았다. 사마는 그가 태어나자 생모와 함께 대륙 백제로 돌아갔지만 정치적 상황이 매우 불안하여 나라백제에 있는 곤지(昆支)에게 다시 보내졌다.

 

 

이처럼 백제 왕실에서 왕자를 마음대로 왜지의 나라백제에 보내기도 하고 데려오기도 한 것은 나라백제(奈良百濟)는 백제가 지배하는 영토였기 때문이다. 백제는 왕자뿐만 아니라 백제의 문물을 왜의 나라백제에 전파하기 위해 백제 주민을 대거 이주시켰는데 403(應神 14) 2, 백제의 봉의공녀(縫衣工女)가 나라백제에 건너갔는데 이것이 일본열도에서 의봉(衣縫)의 원조이다. 공녀가 혼자 간 것이 아니라 대이주집단(大移住集團)의 일원으로 간 것이다. 이렇게 백제의 대이주집단은 일본열도 전역 120여 개 현()에 흩어져 살면서 백제의 문물을 전파했다. 당시 왜()는 의복도 없는 신천지 섬()에 이러한 선진의 문화를 가진 백제의 대민족집단이 이주하였다는 사실은 바로 백제가 일본열도에서 개척을 하고 나아가서는 일본열도 전역을 건설한 것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문자도 없고 의복도 없는 원시생활을 하는 원주민 세계에 문자와 각종의 기술과 말() 등 고도의 선진문화를 가진 백제의 대이주집단이 일본열도에 상륙하였다면 당연히 이 집단에서 통치자인 왕이나 천황이 나올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왜의 나라백제 응신천황(應神天皇)도 백제주민 대이주집단에서 나온 천황이며, 동시에 나라백제(那良百濟) 최초의 천황이었다. 475년 고구려의 공격으로 백제의 도성이 무너지고 개로왕이 잡혀 죽을 때 개로왕의 왕자들은 모두 죽었지만 사마()는 왜()의 나라백제(奈良百濟)에 있었기 때문에 죽음을 면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이 무렵 백제의 상황은 어떠 했을까? 506년 대륙 백제에는 전염병이 들고 3월부터 5월까지 비가 내리지 않아 봄가뭄에 농작물이 말라 백성들이 굶주려 국고로써 구제해야 했다. 고구려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7월에 말갈을 사주하여 백제의 고목성을 공격하자 고목성이 무너지고 600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200여명이 포로로 잡혀갔다.

 

 

그러나 고구려는 4개월 뒤 11, 다시 백제의 마수성을 공격했지만 폭설이 내리자 공격을 하지 못하고 퇴각했다. 백제 무령왕은 5075, 고목성 남쪽에 목책을 세우고 장령성을 쌓아 말갈의 공격에 대비하자 예상대로 고구려는 말갈과 연합전선을 펼치며 공격해 왔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돌아갔으나 그해 10월 고구려는 백제의 한산성을 치기위해 황악산 아래에 병력을 집결시켜 놓고 있었는데 백제 무령왕은 친히 군대를 거느리고 고구려군에 대항하여 싸우자 고구려군은 퇴각했지만 고구려와 백제의 잦은 충돌은 계속되었다.

 

 

5129, 가불성에서 고구려군의 기습에 대륙 백제군은 밀려 가불성을 빼앗기고 다시 산성(山城)도 빼앗길 위기에 몰리자 무령왕은 기마병 4천을 직접 이끌고 나가 위천(葦川) 북쪽에서 고구려군과 격전을 벌렸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백제군은 사기가 되살아났고 백제 무령왕은 자신감을 갖고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백제의 위상을 높이는 표문을 올리자 양나라 왕은 무령왕에게 사지절도독백제제군사영동대장군의 봉함을 내리자 백제의 국제적인 위상은 크게 높았다. 왜지의 나라백제도 소왕국들과 싸워 영토확장에 나서면서 일본국 건설 토대를 마련해 나갔다. 이때 나라백제의 강역은 시고꾸(四國)섬과 마주보는 혼슈(本州)처럼 나온 나라현(奈良縣)이 중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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