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지나친 좌경화(左傾化)가 우려된다 권우상 명리학자. 역사소설가 한국이 패망한 월남을 닮지 않을까 우려된다. 당시 월남은 같은 민족인 공산주의 월맹과 대화하고 협상해서 평화통일을 주장하는 여론이 번져갔다. 이른바 반전평화 여론을 이끌고 간 대표적 집단은 종교인들이었다. 결국 평화란 슬로건 속에서 월남은 1973년 공산월맹과 평화협정을 맺었고 주월 미군이 철수했다. 인간은 누구나 평화를 원하지만 평화라는 개념이 불교는 자비, 기독교는 박애로 불리는 것을 볼 때 종교인들이 평화를 말하는 것은 더욱 당연하다. 1970년대 월남에서도 틱찌광(Thich Tri Quang) 승려, 짠후탄(Tran Huu Thanh) 신부가 자유월남의 구국평화회복반부패운동 조직을 이끄는 등 수 많은 종교지도자들이 앞장서 평화메시지를 전했다. 많은 사람들이 민족· 평화· 화해· 협력· 교류를 강조했고, 국방과 안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사람은 전쟁에 미친, 정신 나간 사람 취급을 받았다. 당시 월남에서 반공을 외치고 나라를 위기에서 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우익인사들은 얼마 안 가서 타살체로 발견됐는데 1973년까지 연평균 무려 840여 명이나 암살당할 정도였다고
칼럼 평화협정,적화통일 하는고도의 전술 권우상 명리학자. 역사소설가 성경(역대하기 18 : 12)에 남(南) 유다의 여호사밧이 부귀 영광이 극하였고 북(北) 이스라엘 아합과 더불어 결혼동맹을 맺었다. 여호사밧이 아합으로 더불어 결혼한 것은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과 아합의 딸 아달랴가 정략 결혼을 하였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여호사밧이 우상을 섬기는 아합과 사돈을 맺었는데 하나님을 섬긴다는 여호사밧이 우상을 섬기는 아합과 평화라는 명분하에 평화협정을 맺은 것이다. 북(北) 이스라엘의 아합왕은 북 이스라엘 왕 중에 가장 악한 왕이었습니다. 아합은 이방여자 이세벨을 아내로 삼았다. 이세벨은 악한 우상숭배 여자였다. 이세벨은 북 이스라엘 전 지역에 바알을 숭배하게 하고 아세라 상을 세워 백성들을 우상숭배에 빠지게 하였다. 이세벨의 딸은 아달랴인데 아달랴는 엄마인 이세벨의 악한 피를 이어 받았다. 아달랴가 정치적 평화협정으로 남(南) 유다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과 결혼하였다. 여호사밧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이다. 여호사밧은 전쟁에 나가기 전에 하나님께 물어 보는 신앙의 사람이었다. 그런데 북쪽의 아합왕에게는 우호적이었다. 여호사밧은 남북
칼럼 멸망할 수 밖에 없는 나라 권우상 명리학자. 역사소설가 위(魏) 촉(蜀) 오(吳) 삼국을 통일한 사마염은 45세에 진(晉)나라 황제가 되었다. 황제가 되기까지는 할아버지 사마의, 큰아버지 사마사, 아버지 사마소의 덕에 의지했다. 그러나 통일의 대업을 이루자 무서운 속도로 타락해 버렸다. 어느날 사마염은 사예교위 유의(劉毅)에게 물었다. “한나라 임금들과 비교하면 짐의 덕성과 재능은 어느 임금과 비교할만 한가?” 사마염으로서는 고조 유방이나 광무제 유수와 비슷하다는 답을 바랐겠지만 유의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후한의 환제나 영제나 비할만 합니다” 사마염은 불쾌했다. “내 덕성과 재주가 옛사람에 미치지 못하지만 그래도 위와 오나라를 평정하여 천하를 통일했고 부지런히 나라를 다스리는데 어찌 환제, 영제에 비하겠는가?” 유의는 더 험한 말을 했다. “환제와 영제는 그래도 벼슬과 작위를 팔았으나 돈이 관청의 곳간에 들어갔습니다. 폐하께서는 벼슬 판 돈을 폐하의 집에 들여 놓으시니 이로서 미루어보면 폐하께서는 환제, 영제 보다도 못합니다” 재물을 탐내기로 소문난 사마염은 확실히 드러내 놓고 벼슬을 팔아 그 돈을 자기 주머니에 넣었다. 사실
칼럼 지카바이러스 정체는 무엇인가? 권우상 명리학자. 역사소설가 전쟁은 한 국가를 통치하는 정치 지도자의 오판에 의해 일어난다. 제1차 세계대전은 사상자의 규모가 매우 컸다는 면에서 실로 대전이었다. 한 통계에 따르면 그 전쟁으로 약 1천여만 명이 사망하고 2천여만 명이 불구가 되었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은 일본 군국주의 지도자의 오판으로 1941년 12월 7일, 일본군이 하와이의 진주만에 있던 미국의 태평양 함대에 먼저 공격을 하면서 발발했는데 그 다음날 미국 의회는 일본에 선전포고를 선언했고 3일 뒤에는 일본과 동맹 관계를 맺고 있던 독일과 이탈리아가 미국에 대하여 선전 포고를 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됐다. 이 대전을 치루면서 일본은 한국과 중국 등 아시아 주변 국가들에게 엄청난 고통과 피해를 주었다. 한 자료에 따르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인명피해는 전사자가 영국 39만8천명, 미국 29만2천명, 프랑스 21만1천명, 소련 750만명, 독일 285만명, 일본 150만6천명이고 참전 6개국의 전쟁비용도 1만1천억 달러라고 한다. 전쟁에서 패한 일본은 점령지 한반도에서 퇴각하자 남북이 분단됐고 북한의 수괴 김일성의
칼럼 북한으로 가는 돈줄 모두 끊어라 권우상 명리학자. 역사소설가 처음 개성공단이 조성될 때 필자는 이 공단이 언젠가는 괴물이 되어 우리에게 큰 재앙으로 다가올 것이라고 경고성 칼럼을 한 일간지에 보도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최근에도 개성공단 폐쇄를 주장하는 칼럼을 보도했다. 이제 필자의 주장이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대한민국은 통일의 기회가 2번이나 눈앞에 왔는데도 이를 놓쳤다. 첫번 째는 김영삼 정부 때 미국 부시대통령이 평양을 한 순간에 폭파(이라크 처럼)할 군사작전 준비를 끝내자 김영삼이 만류하는 바람에 통일의 기회를 놓쳤다. 두번 째는 고난의 행군 때 북한 주민 3백여 만 명이 굶어 죽게 되자 김대중은 돈과 쌀을 퍼주어 망해가는 북한을 살려 냈다. 통일의 기회가 눈앞에 와도 보지 못하는 장님이 무슨 통일을 말할 수 있단 말인가? 2013년에 북한이 먼저 개성공단을 중단 했을 때 폐쇄 했어야 하는데 때 늦은 감이 없지 않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중단이 아니라 완전히 폐쇄해야 향후 더 큰 재앙을 막을 수 있다. 얼마나 우리 국민들이 애타게 개성공단 폐쇄조치를 시급하게 결단하기를 바랬으면 지금 많은 국민들이 박수를 치며 환영하겠는
칼럼 인간의 생명은 소중하다 권우상 명리학자. 역사소설가 유럽에서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수없이 많은 생명이 희생되고 있었지만, 같은 시기에 남극 대륙에서는 생명을 구조하기 위해 대단한 노력이 기울여지고 있었다. 영국계 아일랜드인인 탐험가 어니스트 섀클턴과 그의 대원들은 자신들이 타고 있던 인듀어런스호가 총빙(바다에 떠다니는 얼음이 모여서 언덕처럼 얼어붙은 것)에 부딪쳐 침몰하자 큰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섀클턴은 간신히 대원들을 이끌고 그나마 안전한 피난처인 남대서양의 엘리펀트 섬에 도착했지만 그들은 여전히 매우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섀클턴은 사우스조지아 섬에 있는 포경 기지에 가서 도움을 청하는 것이 그들이 목숨을 건질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 섬은 1100킬로미터 떨어져 있었으며, 그가 가진 배라고는 인듀어런스호에서 건져 낸 7미터 길이의 구명정이 전부였다. 그들은 생존할 가망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섀클턴과 몇 명의 대원들은 17일간의 사투 끝에 1916년 5월 10일 사우스조지아 섬에 다다랐다. 그러나 험한 바다 때문에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섬의 반대편에 배를 대야 했다. 그들은 지도도 없
칼럼 ‘타이태닉호’와 흡사한 현 세계 정세 권우상 명리학자. 역사소설가 1912년 4월 10일, 타이태닉호가 영국 사우샘프턴을 출항, 미국 뉴욕으로 향해중 4월 11일, 프랑스 셰르부르와 아일랜드 퀸스타운(현 코브)에서 승객을 태우고 대서양으로 뱃머리를 돌며 항해중 4월 14일, 저녁 11시 40분경 빙산과 충돌하며 4월 15, 새벽 2시 20분에 침몰하면서 약 1500명이 사망했다. 타이태닉호는 어떤 종류의 배이며 침몰 원인은 무엇인가? 북아일랜드 벨파스트에 위치한 얼스터 민속·교통 박물관에 가면 그에 대한 해답을 알 수 있다. 이 박물관의 전직 책임자인 마이클 매코건은 타이태닉호가 “역사상 가장 유명한 배”라고 말하지만 당시에 타이태닉호만 유명세를 떨쳤던 것은 아니다. 타이태닉호는 벨파스트의 할랜드 앤드 울프 조선소에서 건조한 세 척의 대형 선박 중 두 번째로 건조된 여객선이며 선체 길이가 269미터, 폭이 28미터로 당대에 가장 큰 배 중 하나였다. 화이트스타 해운 회사는 그 대형 선박들을 이용해 수익성이 좋은 북대서양 항로를 장악할 계획이었다. 운항 속도에서 경쟁사인 쿠나드 사에 뒤쳐져 있던 화이트스타 사는 부호와 유명 인사
칼럼 천장지비일석지지(天藏地泌一席之地) 권우상 명리학자. 역사소설가 풍수지리를 모르는 사람은 길지라고 하면 기도원과 집터가 같을 것으로 알고 있지만 기도원과 집터의 길지는 다르다. 서울시 중구 명동 2가 1번지에는 한국카톨릭을 상징하는 명동 대성당이 자리 잡고 있다. 1977년 11월 22일에 사적 제258호로 지정된 대성당은 1만 442m2의 땅위에 건평은 1천 498m2이다. 1898년 프랑스 코스트 신부가 축성 봉헌한 이래 성당을 중심으로 수녀원, 문화원, 교육관, 계성여고 등 카톨릭과 관련된 집합 건물을 모두 합하면 명동 전체를 양쪽으로 분할할 만한 규모로 면적이 방대하다. 명동성당을 풍수지리적으로 풀이하기 전에 땅의 내력을 살펴 보자. 원래 이 땅은 조선 순조대왕(1801- 1834) 당시 벼슬을 지낸 윤정현이 살던 집터로 바깥채만 60여 간에 달할 만큼 엄청난 규모의 집터 자리였다. 조선시대 벼슬아치들은 집을 지을 때 풍수지리를 보는 것은 기본이다. 따라서 이 집터도 풍수지리를 봐서 지었을 것이다. 더구나 판서의 높은 지위까지 오른 고관의 저택을 지으면서 명당자리가 아닌 땅에 짓는 경우는 거의 없어 이 땅도 명당으로 보인다.
칼럼 옛날의 설 모습 권우상 명리학자. 역사소설가 농경시대의 설 모습은 우리 민족 고유의 설 모습 그대로라고 할 수 있다. 설날이 임박한 2, 3일전에 집집마다 떡방아를 찧고 가마솥에 쌀, 들깨, 콩 등을 뽁아서 엿기름을 버물어 방망이로 밀어 강정을 만들고 식혜를 빗는 등 여자들은 음식 만들기에 분주하며, 남자들은 돼지나 닭을 잡기도 한다. 명절 냄새가 풍기는 즐거운 모습이다. 산업사회로 넘어가면서 뻥튀기 하는 기구가 생겨났고, 어느 집이나 뻥튀기를 하기 때문에 아침 일찍부터 쌀, 옥수수, 콩 을 자루에 넣어서 아이들이나 아낙네들이 줄지어 서서 차례가 오기를 기다리곤 했는데, 어떤 때는 긴 행렬이 백여 미터나 늘어서 있기도 했다. 또한 떡국을 먹기 위해 집집마다 가래떡을 빚기도 했는데, 떡방아간 앞에는 새벽부터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설날이 다가오면 아이들은 며칠전부터 잠을 설쳤다. 모처럼 입어보는 새 옷과 새 신발을 신고 집안 어른들에게 새배를 하면 새뱃돈을 얻는다는 기쁨에 한껏 젖어 있었다. 아버지가 장에 가서 옷과 신발을 사오기 때문에 아이들은 장날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일년에 한번 돌아오는 설이 와야 새 옷과 새
최근 구미시는 불합리하고 비상식적인 인사행정(400여명)과 경제여건의 어려움을 겪는 이중삼중고의 고통을 겪고 있다. “민생은 파탄이고 경제는 어려운데 남 시장은 가는 곳마다 황제처럼 자신이 마치 박정희대통령과 버금가는대단한 지도자인 것처럼 축사를 하고 다닌다“. 는 말이 주류를 이룬다. 남 시장은 “구미 민생은 파탄이라 떠들고 다니면서 대안은 하나도 없다. 인사가 만사인데 원칙도 개념도 없다“. 는 여론이 팽배하다. 특히 금년도 구미시 예산 1조 1000억중 "선심성 전시성 예산이 절반을 넘는다" 는 지적이다. 남 유진 시장의 무소불위 안하무인 행정은 극에 달해 민생은 점점 피폐해지고, 시민들 고충은 나날이 극심해지고있다. 전체 예산중 결식아동과 소외계층의 배려는 한 푼도없다. 구미 경실련에 따르면 “지난 2012년10월 초유의 불산유출사고 때에 남 시장은 사고의 해결은 도외시하고 골프를 치러 다녔으며, 지난해 전국적인 메르스 공포와 가뭄이 심각한 상황에서도 구미시장은 차기 경상북도도지사를 꿈꾸며, 성주군의 모 건설업체 대표와 골프를 치러 다닌다“고 밝혔다. 지난해 구미시는 전반기 노인 요양시설의 시설점검도 하지 않았으며, 무허가 식당이 판을 치고
칼럼 중국은 음식 천국 권우상 명리학자. 역사소설가 중국은 음식 천국이다. 요리가 너무 풍부해 몇 달 동안 끼니마다 다른 음식을 마음대로 맛 볼 수 있다. 그런데 옛날에도 그처럼 중국에 음식이 풍부 했을까? 현존하는 사록으로는 삼국시대에 어떤 요리가 상에 올랐는지 알아내기가 어렵지만 채소의 역사를 분석해 보면 중국 고대의 음식상은 그다지 풍성하지 못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소나 양, 돼지 따위는 사육한 역사가 오래이므로 기원전 몇 백 년인 춘추전국시대에도 좋은 음식으로 상에 올랐는데 채소는 고기에 비하면 매우 뒤떨어졌다. 시경(時經)에 132종의 식물이 나오는데 그 중에 식품 식물은 20여 종이며 그 절반이 후세에는 식품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쓴맛이 나는 박잎도 상에 올랐다고 하니 채소가 매우 부족했음을 알 수 있다. 후한이나 삼국시대에 이르러서는 형편이 좋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중국이 원산지인 배추가 그 때까지 만 해도 맛이 시답지 않아 주요 식용 채소가 아니었다. 당시의 다섯 가지 주요 채소를 보면 규(葵), 곽(藿), 해(薤), 총(蔥), 구(韭)였다. 규는 수백년 세월을 가진 이름난 채소로 한나라 사람들은 채소
칼럼 유년운이 좋아야 학교 성적이 오른다 권우상 명리학자. 역사소설가 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의 학생은 유년기 대운이 길운이어야 한다. 즉 용신운을 만나야 한다. 용신운이란 열차에 비유하면 기관차와 같은 역할을 한다. 이 용신이 잘 살든 못살든 그 사람의 한 평생의 운을 좌우한다. 그러므로 용신을 생조하면 길운이고 용신을 극제하면 흉운이다. 머리가 좋아도 유년운이 흉운이면 공부가 하기 싫어 성적이 부진해진다. 운이 나쁘면 시험문제와는 먼 거리에서 공부를 하기 때문에 성적이 오르지 않는다. 어릴 때부터 천재적인 두뇌는 유년운과 대운이 동시에 길운이고 사주에 관살이 없는 생일이 신해일(辛亥日)에서 많이 나온다. * 쥐띠 10월생, 소띠 9월생, 범띠 8월생, 토끼띠 7월생, 용띠 6월생, 뱀띠 5월생, 말띠 4월생, 양띠 3월생, 원숭이띠 2월생, 닭띠 1월생, 개띠 12월생, 돼지띠 11월생의 초년운 = 두뇌가 명석하고 감정이 풍부하고 뛰어난 사고력과 남다른 재주를 지니고 있으며 매사에 신중하고 치밀한 계획에 의해 실천하는 성격이다. 선천적으로 허약한 체질이니 4살 전까지는 잔병치레를 자주하며 5살 - 6살이 되면서 건강체질로 변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