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최초의 동성연애 ‘맷돌 부부’ 권우상 명리학자. 역사소설가 문종의 후비 현덕왕후 권씨는 충청도 홍주의 합덕현에서 아버지 안동 권씨 화산 부원군 권전과 어머니 해주 최씨의 딸로 태종 18년에 태어났다. 세자 향은 세종 3년 8세에 세자로 책봉되어 세종 9년 14세 때 김오문의 딸 김씨와 혼인하였으나 세자가 그녀에게 관심을 갖지 않자, 김씨가 세자의 사랑을 되돌릴려고 해괴한 비방을 사용하다 폐출되었다. 세종 13년에 현감 봉여의 딸 순빈 봉씨를 세자빈으로 맞아 들였지만 세종 14년 세자가 무관심 하게 대하자, 순빈 봉씨는 동성연애에 빠지게 되었다. 그때 예조에서는 ‘세자도 후궁을 들여야 한다’고 제도화를 했는데, 이때 열 다섯 살의 권씨가 임신하자, 후궁으로 책봉되었다. 이때 19세인 순빈 봉씨는 시비 ‘소쌍이’와 매일 뜨거운 밤을 보내고 있었다. 소쌍이의 능란한 애무 솜씨는 순빈 봉씨의 몸을 마음대로 다루었다. 소쌍이의 손놀림에 순빈 봉씨는 황홀해지며 호흡이 거칠어지자 소쌍이가 말했다. “마마, 시원하시와요?” “응응, 더 세게. 그래, 더 세게 눌러 다오.” “네, 마마, 알겠사옵니다.” 소쌍이는 세자빈 봉씨를 마음대로 다루었다. 그
칼럼 부자는 대운이 용신을 밀어줘야 권우상 명리학자. 역사소설가 흔히들 사주를 인용한 속담 비슷한 말이 몇가지 있다. ‘사주팔자 잘못 타고 난 죄밖에 없다’ ‘사주에 없는 관을 쓰면 이마가 벗겨진다’ ‘팔자소관이다’ ‘팔자는 못 고친다’ ‘팔자는 독에 돌어가서도 못 피한다’ ‘팔자가 좋으면 동이장수 며느리 됐겠느냐?’ 등이 있는데 이와 같은 말들은 결과에서 나온 현실 타협용이거나 위안 겸 자위용이기 쉽다. 환경에 대한 적응력이 가장 빠른 동물 중의 하나가 사람이다. 체념의 결과를 받아들이면서도 희망이 있기에 다음을 위해 도전을 준비한다. 또한 망각이란 편리한 약이 있기에 어느새 잊어버리고 새로운 일에 흥미를 갖게 된다. 결과론에서의 팔자타령보다 그 팔자를 앞서 알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 새로운 흥미를 가져 보는 것은 어떨까? 부자(富者)의 종류를 크게 5가지로 나눈다. (1) 종신부자형(終身富者型) =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부자로 사는 사람이다 (2) 선부후빈형(先富後貧型) = 태어나서 중년까지 잘 살고 중년 이후는 가난하게 사는 사람이다. (3) 선빈후부형(先貧後富型) = 태어나서 중년까지는 가난하게 살고 중년 이후는 잘 사는
금식하다 죽어불라요. 이곳에 와서 많은 분과 이별을 했습니다. 기독교에선 또 만남을 고대하는 이별이지만, 그래도 이생에서의 이별은 늘 슬픕니다. 여긴 장애인거주시설이다 보니 아프거나 치매가 심해지면 전문요양병원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별했지만 아직도 마음에 남아 있는 분이 있습니다. (이하 권사로 호칭) 어머니를 이곳에 모시고 마치 죄인이나 된 것처럼 고개를 숙이던 자녀들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우리가 잘 모신다곤 했지만, 그래도 자식들만큼은 아니었기에 늘 제 마음은 죄송스러웠는데, 권사님이 이 목사를 끔찍이 생각하셨던 것처럼, 자녀들 또한 비록 원목이지만 목사로서 인정해주고 저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복지사들에게도 늘 고마워했던, 정말로 요즘 보기 드문 이용자 보호자들이었습니다. 천국가시는 길에 가 뵙지 못하여 못내 가슴이 아픕니다만, 치매로 정신이 희미해져 가면서도 이 목사만큼은 끔찍이 챙겼던 분입니다. 가장 진하게 대화를 했던 분으로 일화를 하나 소개 합니다. 목사님을 찾는다는 소리에 다급하게 2층 생활실로 갔습니다. 이곳에 올 때는 그렇게 심하신 것 같지는 않았는데 치매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신 권사님께서 목사님께 허락을 받고 금식을 하겠다
칼럼 원님과 「관상쟁이」 권우상 명리학자. 역사소설가 어느 산골 마을에 사는 젊은이가 일자리를 얻으려고 읍내에 와서 주막집에 묵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이 마을 원님의 하인이 술에 잔뜩 취해 거들먹거리며 주막집에 들어오더니 무턱대고 주인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주먹질을 하는 것이었다. 이 광경을 본 젊은이는 못된 하인이 너무 미워서 “그 녀석, 관상을 보니 이틀을 못넘기고 저승으로 가겠구만!” 하고 욕설을 퍼부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하인은 이틀째 되는 날 갑자가 죽고 말았다. 그러자 젊은이가 용한 관상쟁이라는 소문이 순식간에 온 읍내에 쫙 퍼졌다. 이 소문을 들은 원님은 자기의 하인을 죽인 젊은이를 혼내주려고 젊은이를 관아로 잡아 들였다. “네 이놈! 관상을 그렇게 잘 본다는데 네 놈은 언제 죽을 것 같으냐?” 주위를 살펴보니 숱한 병졸들이 몽둥이를 들고 서 있었다. 보아하니 원님이 하인의 원수를 갚으려는 병졸들을 보낸 것이 분명했다. 그러자 젊은이는 즉시 꾀를 내서 대답했다. “예 나으리, 저의 관상을 보고, 또 나으리의 관상을 보니 저는 나으리보다 이틀 먼저 죽게 될 것 같습니다.” 이 말을 듣자 원님은 겁이 덜컥 났다. ‘만일 오
시인/수필가 김병연 걱정 돈이 많으면 걱정이 없을 것 같지만 천석꾼은 천 가지 걱정 만석꾼은 만 가지 걱정 그래서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다고 했다 그러나 돈 좋은 걸 모르는 사람은 바보와 성인군자뿐이다 그렇지만 걱정 없이 사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뿐
칼럼 원님과 봇짐장수 권우상 명리학자. 역사소설가 옛날에 창과 방패를 파는 사람이 장군들 속에 들어가 창과 방패를 들고 목청을 높여 말했다. 「여러분! 이 방패보다 더 단단한 건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아무리 날카로운 창으로 찔러도 끄덕 없습니다」 이번에는 창을 들고 소리쳤다. 「이 창만큼 날카로운 건 이 세상 아무데도 없습니다. 이 창에 찔리기만 하면 아무리 단단한 방패라고 뚫리고 맙니다!」 그러자 한 젊은이가 큰 소리로 물었다. 「당신의 말대로 하면 당신의 창은 그 어떤 방패도 뚫고 나가며, 당신의 방패는 그 어떤 창도 뚫지 못한다는 거지요? 그렇다면 당신의 창으로 당신의 방패를 찌르면 어떻게 된다는 말이요?」 구경꾼들이 와! 하고 폭소를 터뜨렸다. 질문에 대답이 막힌 장사꾼은 급히 자리를 떠났다. 장사꾼은 왜 말문이 막혔을까? 그것은 모순율을 위반하고 자체 모순에 빠졌기 때문이다. 「모순율」이란 어떤 사고 대상에 대하여 동일한 시간과 관계 하에서 두 가지 모순되는 판단을 가질 수 없다고 확정하는 사고의 법칙이다. 즉 동일한 대상에 대하여 동일한 시간과 관계 하에서 서로 모순되는 주장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모순율은 어떠한 사고나
조강지처(糟糠之妻) 아내와 아들 셋, 그야말로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열심을 다하여 살았던 서민층의 대표 영수씨 이야기입니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다가 상경하여 처음 갖게 된 직업이 건축 일이었습니다. 말이 건축이지 막노동이었습니다. 배운 것이 건물에 벽돌 쌓는 기술이어서 몇 명의 인부들을 고용할 정도로 벌이가 괜찮았습니다. 직업이 직업이니만큼 건축 일이 있는 곳이면 전국 어디든 달려가서 열심을 다 해 일했습니다. 자식들과 아내를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몸을 사리지 않고 돈을 벌었습니다. 그리고 일이 끝나면 보름에 한 번이든지 한 달에 한 번이든지 집에 오게 되었고, 또 다른 공사를 맡아달라는 제의가 들어오면 나가서 며칠씩 일을 하는 생활을 10년이 넘게 했습니다. 무엇보다 자식들이 아무 탈 없이 무럭무럭 자라주었고, 많은 액수의 돈은 아니지만, 아내에게 갖다주면 그것을 알뜰살뜰 모으는 재미도 있었습니다. 돈 버는 일에 재미가 들려서 그랬는지 남들은 가족여행이라는 것도 한다는데 영수씨는 그게 사치라고 생각되어 더욱 열심히 일만 했습니다. 조금만 더 고생하면 서울에 작은 아파트 한 채는 장만할 수 있다는 꿈을 꾸면서 말입니다. 그리고 자식들이 초등학교를
‘TK’라고 하면 누구나 다 아는 것처럼 대구·경북을 일컫는 말입니다. 언제부턴가 자부심의 단어가 아니라 독재라는 이미지가 더 강하게 다가오는 것도 사실입니다. 사실, 저는 경상북도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조상 때부터 경상북도 금릉군 어모면이 원적이며, 성이 의성 김가입니다. 의성에 6촌들이 살고 있다는 얘긴 들었지만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경기도 포천에서 살다가 할머니 손에 이끌려 정착하게 된 게 아버지의 고향인 경상북도 금릉군 개령면 동부동 272번지였습니다. 시력이 약해지기 시작하여 맹학교로 오기까지 10여 년 그곳에 살았는데 나이 60이 되어 돌아보니, 제겐 잊을 수 없는 고향 중의 고향입니다. 그 당시, 눈이 사시였던 저를 사팔이라고 놀리는 아이들도 많았지만, 곁에서 늘 놀리는 녀석들과 맞서주었던 친구들이 있었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친구가 대구로 전학 간 술도가집 아들입니다. 그리고 이미 고인이 된 임대목집 손자입니다. 그리고 함께 교회를 다녔던 양규, 수영이, 종호 등등 여럿이 있습니다. 술도가집 아들은 그 당시 동네에 텔레비전이 있는 곳이 몇 집 안 됐는데 늘 나를 불러다 TV를 보여줬습니다. 그 당시 ‘여로’라는 연속극을 잘 봤습니다
칼럼 화목하게 생각을 돌아보자 권우상 명리학자. 역사소설가 인간관계에 있어서 사람은 다투기도 하고 화목하게 지내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면서 화목함이 그리 쉽지 않다. 그러나 이익으로 화목을 이끌어 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동지애로 화목을 이끌어 가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사실상 사람이 있는 곳에는 견해가 다르기 마련이고, 이해관계가 서로 얽혀 있기 마련이어서 화합하기가 쉽지 않다. 우리들의 가정에서 사회에까지 심지어는 국가와 국가간에도 갈등과 불화 아니면 이런저런 시시비비가 끓이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심지어는 인종, 언어, 습관, 풍습, 지역이 다르다는 이유로 곳곳에서 분쟁이 일어나고 있다. 그래서 국가를 다스리는 통치자는 인화(人和)와 국민 단결에 힘써야 하지만 지금 대한민국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불가에서는 흔히 「총림에는 별다른 일이 없는 것을 흥성하는 것으로 삼는다」고 하는데, 사람관계가 화목해야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게 된다. 승단(僧團)에서는 평소 「육화경(六和敬)」에 의해서 사람과 일의 화합을 이끌어 나가고 있다고 한다. 즉 신체적으로 화합하여 대중을 이루고 함께 지낸다(身和同住), 언어가 다툼이 없다(口和無諍), 뜻
칼럼 사흘만에 쫒겨난 사또 권우상 명리학자. 역사소설가 옛날 어느 고을에 한양에 사는 대감의 외아들이 신관 사또로 부임에 왔다. 이 사람은 워낙 천방지축 철부지였지만 애비덕에 영특한 아내를 얻고 고을 원님으로 오게 되었다. 그런데 부임하여 이튿날이었다. 남의 소를 빌려 밭을 갈다가 점심때가 되어 언덕에다 소를 매어 놓고 점심을 먹고 와 보니 소가 벼랑에서 굴러 떨어져 죽자 소 주인은 당장 소를 사 내라느니, 농부는 차차 벌어서 변상을 하겠다느니 하면서 서로 다투다가 사또의 현명한 판결을 받으려고 상소하러 왔다. 사연을 다 듣고난 신관 사또는 「여봐라, 게 좀 기다리고 있거나!」 하고는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좋을지 몰랐거니와 또 집을 떠날 때 「어떤 일이든 혼자 처리하지 말고 네 아내와 상의한 후 처리하도록 하라」고 한 애비의 당부가 있었기에 부인에게 상의하러 들어간 것이다. 남편의 말을 듣고 부인은 「아니 그만한 일도 처리하지 못하십니까?」하고 핀잔을 준 다음 말했다. 「소 주인이야 어찌 소 값을 물어내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고 소를 빌려 쓴 사람은 무슨 돈이 있어 당장 소를 사주겠습니까? 죽은 거야
칼럼 실패보다 더 나쁜 것은 무엇일까? 권우상 명리학자. 역사소설가 실패보다 더 나쁜 것은 거짓된 성공이다. 우리는 어떤 일을 위해 노력하다가 실패할 경우 그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 조처를 취할 수 있다. 그렇지 않더라도, 최소한 실패한 경험을 통해 교훈을 얻어 다음에는 더 잘할 수 있다. 하지만 거짓된 성공은 다르다. 거짓된 성공의 길을 걷는 사람은 실제로는 중요한 것을 잃고 있으면서 자기가 성공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질 수 있다. 그런 사람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수 있다. 한 사례를 보자. 예수께서는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영혼을 잃으면 그에게 무엇이 유익하겠습니까?”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마태복음 16:26) 이 말씀은 돈과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을 추구하는 데 자신의 인생을 다 바치는 사람들에게 잘 적용된다. 이것은 거짓된 성공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직업 카운슬러인 톰 데넘은 이렇게 지적한다. “승진할 생각, 돈을 더 벌 생각, 더 많은 것을 가지려는 생각만 하는 사람은 진정한 만족을 얻지 못한다. 단순히 금전적인 측면에서만 성공을 평가하는 사람은 깊이가 없는
칼럼 청심과욕(淸心寡慾) 청운지지(靑雲之志) 권우상 명리학자. 역사소설가 중국 전한(前漢) 시대 두태후(두희)는 조(趙)나라 청하의 관진 사람이다. 여태후 때에 두희는 양가(良家) 자녀로 궁중에 들어와 여태후(한나라 고조 유방의 부인)를 모셨다. 당시에는 양가의 자녀를 궁중에 보내졌다. 여태후는 제후의 왕에게 각각 다섯 명의 궁녀를 하사했다. 두희도 가야할 사람 중의 하나였다. 두희는 고향의 청하였으므로 조(趙)나라에 가서 자기의 집과 가까이 살고 싶었다. 그래서 궁녀를 파견하는 일을 주관하는 환자(宦者)에에 간청했다. “저의 명부를 반드시 조나라로 가는 사람 가운데 넣어 주십시오” 환자는 그렇게 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환자가 깜빡 잊어 버리고 그녀의 명부를 대(代) 나라로 가는 사람들 중에 넣었던 것이다. 떠날 때가 되자 두희가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다. 그 환자를 원망하면서 대나라 땅으로 가지 않으려 했으나, 이미 여태후에게 보고된 이상 변경할 수 없어 운명이 기박하다고 한탄하면서 대나라 땅에 도착했다. 그런데 대나라 왕 유황은 여러 궁녀들 중에서 두희만을 총애하여 딸 포(笣)를 낳았다. 이에 앞서 대나라 왕 유황의 왕후는 아들 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