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큰 인물은 언제나 목표가 정해져 있다 권우상 명리학자. 역사소설가 성경에 ‘달란트’의 비유가 나온다. 어느 주인이 세 하인에게 각각 5달란트, 3달란트 1달란트를 맡기고 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와 하인들과 결산하는 이야기다. 주인에게 5달란트와 2달란트 받아 열심히 투자하여 굴려서 곱절로 불린 두 하인은 크게 칭찬을 받고 포상금을 받지만 주인에게 받은 1달란트를 땅속에 묻었다가 그대로 내놓은 하인은 크게 꾸지람을 듣고 1달란트마저 빼앗기고 만다. 이는 강자는 더욱 강해지고 약자는 더욱 약해지며, 더욱 부유해가는 반면에 가난한 자는 더욱 빈곤해 질 수 밖에 없는 인류 생존경쟁의 영원불변의 진리를 말해주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출생한 그 순간만큼은 모두 다 평등하지만 그 다음부터는 거센 세상의 풍랑에 사방에서 몰려오는 포말처럼 ‘평등’은 산산조각 나고 만다. 그러나 빈곤한 환경에서 태어났지만 노력으로 행운을 얻어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풍요롭고 부유한 환경에서 한 순간 쫒겨나는 사람도 있다. 여기에서 큰 인물과 작은 인물로 구별된다. 그렇다면 큰 인물은 어떤 사람이며, 작은 인물은 어떤 사람일까? 큰 인물은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걸출한 성
칼럼 산봉우리 모양과 자손의 운기 권우상 명리학자. 역사소설가 「삼국지」에서 장수 위연이 자기의 주인을 배반하고 유비에게 항복하려 할 때 곁에 있던 제갈공명이 위연의 광대뼈가 나온 상을 보고 후일을 위하여 죽이자고 한다. 덕장인 유비가 항복하는 장수를 죽일 수 없다며 물리친다. 유비와 제갈공명이 죽고 난 후 위연은 제갈공명의 계책으로 처형된다. 예수님을 밀고한 유다나 아버지 같은 시저를 저격한 부루투스나, 자기가 모시는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 상은 어떨까?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음 모른다’는 속담이 만고의 귀감이다. 배신하는 사람을 알기 위해서 사람의 성격을 알 수 있는가? 비명횡사나 급사는 어디서 오는가? 사주명리학은 그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풍수지리에서는 산봉우리 모양을 여덟 종류로 분류하는데 인반중침(人盤中針)이라 하여 나경패철을 사용한다. 음택묘지(陰宅墓地)와 양택주거지(陽宅住居地)를 선정하는데도 나경패철을 사용한다. 나경패철은 주(周)나라 성왕(成王)때 주공(周公)이 만든 데서부터 유래한다. (1)건산(乾山)∼천주(天柱)라고 한다. 혈(穴)뒤에서 건산이 용립하고 풍만하면 자손들이 장수하고 건산 모양이 천마(天馬) 같으면 큰 인물이
칼럼 세상에서 가장 크고 무서운 바가지 권우상 명리학자. 역사소설가 인간은 자기가 살아 온 주변의 환경과 삶의 경험에 의하여 상대방의 말을 받아 들이고 판단한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것도 여러분 각자가 받아들이는 판단 기준이 다를 것이다. 왜 다를까? 그것은 여러분들이 삶을 통해 얻은 지식과 삶에서 얻는 경험의 바탕이 나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즉 가치관(價値觀)이 다르다. 인간의 감정에는 일곱 가지의 정(情)이 있다. 즉 기쁨(喜), 성냄(怒), 사랑(愛), 즐김(樂), 슬픔(哀), 미움(惡), 탐냄(慾) 등이다. 인간은 한 가족이 방안에서 얼굴을 맞대고 있어도 각자 생각이 다른 것은 일곱 가지의 정신작용 때문이다. 나와 친분이 있는 여자 한 분이 있었다. 이 여자는 고급 승용차를 갖고 60평 규모의 고급 아파트에 살았다. 남편은 대기업 임원이었고, 2남 1녀의 자녀를 둔 가정으로서 고급 아파트에서는 가장 잘 사는 편에 속했다. 그런데 이 여자는 대학동창회에만 갔다오면 속이 부글부글 끓고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실토하기에 내가 그 이유를 물어보니 그녀의 말인즉 자기가 사는 아파트에서는 자기가 가장 잘 산다고 남들이 부러워 하는데 대학동창회에 가면 자기 보다 더
칼럼 인생의 고통, 불성(佛性)을 깨닫자 권우상 명리학자. 역사소설가 사람이 죽으면 육신은 흩어져 사대로 돌아가고 영혼만 남게 된다. 영혼은 불교식으로 말하면 업식이라고 한다. 마음이라고 하면 업식과 생명 에너지, 그리고 그 작용을 다 뭉뚱그려 말하는데 마음은 무한량이고 빛보다도 빠르고 형체가 없으니 못미치는 데가 없다고 하는 것은 마음의 본성, 쓰임을 말하는 것이다. 인간은 육신과 영혼이 결합되어 인간의 모습으로 활동하게 된다. 그런데 육신이 나도 아니고 의식이 나도 아니다. 영혼이라는 것은 업식을 말하는 것인데, 그것 또한 참나가 아니다. 불성 즉 영원한 생명의 불과 업식, 부모의 정혈이 삼합을 이뤄야 생명이 탄생하게 되는데 어느 것 하나를 떼어서 이것이 나라고 할 수 없다. 오늘날 나를 있게 한 근본주체, 또는 자성불을 참구해 보자. 자성불은 더하고 덜함이 없이 찰나를 여여하게 광대무변하게 전체로 돌아가는데, 중생들이 개별적인 나에게 집착하니까 참나는 어떻게 생겼을까, 어디에 있을까, 무엇이라고 할까 하고 자꾸만 알고 싶어진다. 모든 중생에게 다 불성이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불성을 깨닫을 수 있을까? 말하고 묻고 생각하는 게 다 생명의
칼럼 진정한 믿음은 어떤 것인가? 권우상 명리학자. 역사소설가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이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어야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 믿음은 공적의 어머니라 할 수 있다. 쉽게 말하자면 나무가 제 뿌리를 믿는 것을 생각해 보자. 뿌리가 영양분과 물을 공급해 주니까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고 든든하게 버틸 수 있다. 그런데 그 나무가 제 뿌리를 믿지 않고 다른 나무의 뿌리를 믿는다면 안되는 것이다. 이처럼 믿음이라는 것도 따로 믿을 대상이 있어서 믿어야 한다는 게 아니라 사람마다 자신의 뿌리, 즉 근본 자리를 믿어야 한다. 근본 성품 자리에서 보면 믿는 자도 믿을 대상도 믿는 것도 없다. 왜냐하면 내가 그대로 주인공이고, 우주이며, 그대로가 공(空)인데 무엇을 믿고, 무슨 대상이 따로 있겠는가. 내 자신 그 모습 그대로가 부처이며, 주인공의 나툼(종교적인 기도의 힘, 또는 절대권능자의 출현등으로 일어나는 불가사의한 작용, 현상들)이니 말이다. 비유하면 나무가 뿌리를 믿는다고 하지만 실은 나무 줄기나 가지나 잎이 뿌리와 따로 있는 둘이 아니라 그대로가 하나이니 믿고 말고 할 것도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자신이 바로 부처이며, 내가 곧 우주라는 것을 모
칼럼 세상에서 가장 크고 무서운 바가지 권우상 명리학자. 역사소설가 인간은 자기가 살아 온 주변의 환경과 삶의 경험에 의하여 상대방의 말을 받아 들이고 판단한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것도 여러분 각자가 받아들이는 판단 기준이 다를 것이다. 왜 다를까? 그것은 여러분들이 삶을 통해 얻은 지식과 삶에서 얻는 경험의 바탕이 나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즉 가치관(價値觀)이 다르다. 인간의 감정에는 일곱 가지의 정(情)이 있다. 즉 기쁨(喜), 성냄(怒), 사랑(愛), 즐김(樂), 슬픔(哀), 미움(惡), 탐냄(慾) 등이다. 인간은 한 가족이 방안에서 얼굴을 맞대고 있어도 각자 생각이 다른 것은 일곱 가지의 정신작용 때문이다. 나와 친분이 있는 여자 한 분이 있었다. 이 여자는 고급 승용차를 갖고 60평 규모의 고급 아파트에 살았다. 남편은 대기업 임원이었고, 2남 1녀의 자녀를 둔 가정으로서 고급 아파트에서는 가장 잘 사는 편에 속했다. 그런데 이 여자는 대학동창회에만 갔다오면 속이 부글부글 끓고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실토하기에 내가 그 이유를 물어보니 그녀의 말인즉 자기가 사는 아파트에서는 자기가 가장 잘 산다고 남들이 부러워 하는데 대학동창회에 가면 자기 보다 더
칼럼 산봉우리 모양과 자손의 운기 권우상 명리학자. 역사소설가 「삼국지」에서 장수 위연이 자기의 주인을 배반하고 유비에게 항복하려 할 때 곁에 있던 제갈공명이 위연의 광대뼈가 나온 상을 보고 후일을 위하여 죽이자고 한다. 덕장인 유비가 항복하는 장수를 죽일 수 없다며 물리친다. 유비와 제갈공명이 죽고 난 후 위연은 제갈공명의 계책으로 처형된다. 예수님을 밀고한 유다나 아버지 같은 시저를 저격한 부루투스나, 자기가 모시는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 상은 어떨까?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음 모른다’는 속담이 만고의 귀감이다. 배신하는 사람을 알기 위해서 사람의 성격을 알 수 있는가? 비명횡사나 급사는 어디서 오는가? 사주명리학은 그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풍수지리에서는 산봉우리 모양을 여덟 종류로 분류하는데 인반중침(人盤中針)이라 하여 나경패철을 사용한다. 음택묘지(陰宅墓地)와 양택주거지(陽宅住居地)를 선정하는데도 나경패철을 사용한다. 나경패철은 주(周)나라 성왕(成王)때 주공(周公)이 만든 데서부터 유래한다. (1)건산(乾山)∼천주(天柱)라고 한다. 혈(穴)뒤에서 건산이 용립하고 풍만하면 자손들이 장수하고 건산 모양이 천마(天馬) 같으면 큰 인물이
칼럼 인생은 바람과 같은 것이다 권우상 명리학자. 역사소설가 세상만사가 뜻대로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권세로 되는 것도 아니며, 돈으로 되는 것도 아니다. 가운(家運)과 국운(國運)과는 절대적 관계이다. 모름지기 흥(興) 뒤에도 패(敗)가 있다. 또한 사업가는 사업을 성취시키려면 강성한 기질에 부드러운 외모가 중요하다. 성질도 부드러우면 외모 역시 부드러워야 한다. 성질도 부드럽고 외형도 너무 부드러워 남에게 돈이나 떼이면 안 되고 강한 면도 있어야 경쟁자에게 밟히지 않고 성공을 거들 수 있다. 가수의 경우 중앙무대에서 활동하는 사람도 있고 지방 무대에서 활동하는 사람도 있다. 중앙 무대인 대도시에도 막일 하는 사람, 밑바닥을 기는 사람 등 별의별 사람이 다 있다. 백인백색이고 각양각색이다. 그것이 세상살이 모습이다. 인생사 형성이 그러하거늘 모두 다 자기가 똑똑하다고 해서 천직을 기피하고 팔자에 없는 재물이나 권력을 차지하려 한다면 어디 세상이 잘 돌아갈 리가 없을 것이다. 사람이 먹고 살기 위해서는 집안이 있어야 한다. 집안의 구조를 보자. 밥을 짓는 부엌이 있고, 또 뒷간도 있다. 부엌만 있고 뒷간이 없으면 그 일처럼 더 큰 일이 어디 있겠는가.
칼럼 이런 사람은 행운을 부른다 권우상 명리학자. 역사소설가 행운을 부르는 사람들을 보면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는 즐겁게 보인다. 그것은 만나보면 금방 알 수 있다. 그 사람들에게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즐거운 분위기가풍긴다. 대부분 행운을 부르는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일생을 보내고 있기 때문에 즐거울 수 밖에 없다. 그들과 만나서 대화를 나누어 보면 상대방의 기분마저 좋아진다. 따라서 상대도 좋은 일만 하게 되니까 행운을 부를 수 밖에 없다. 행운을 부르는 사람들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재미있는 경험도 많이 한다. 이들이 어떤 이야기를 하더라도 즐거워 보인다. 그래서 듣는 사람은 동화되어 버린다. 행운을 부르는 사람들의 또 다른 특징은 인생관이 철저하다. 그래서 오직 자신이 좋아하는 일만 한다. 그들은 스스로 세상 경험을 해서 싫어하는 일을 하는 것만큼 불행한 일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자신이 싫어하면서 인생을 보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다. 즐겁게 인생을 사는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짧은 인생에서 가능하면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라. 그러면 일도 잘 되어 능률이 올라 일하는 것도 흥미롭고 행운이
칼럼 원한은 혹독한 응보를 받는다 권우상 명리학자. 역사소설가 옛날 제(齊)나라에 이역(夷㑊)이라는 대신이 있었다. 어느 날 왕의 초대를 받아 술을 마셨는데 잔뜩 취해 버렸기 때문에 밖으로 나와 대궐 문에 기대어 바람을 쐬고 있었다. 문지기는 전에 단족형(斷足刑)을 받은 사나이였는데 “술이 남아 있으면 적선해 주십시요”라며 간청했다. “저리 가지 못해! 죄수 출신인 주제에 이 어르신네에게 술을 달라고 하다니.” 문지기는 대신에게 심한 욕을 먹고 물러났지만, 대신이 자리를 뜨자 대궐 문 주위에 마치 소변을 본 모양으로 물을 뿌려 놓았다. 다음날 왕이 이를 보고 호통쳤다. “대궐 문에서 소변을 본 자가 누구냐?” 문지기는 시치미를 떼고 대답했다. “소변 보는 것은 보지 못했습니다만 간밤에 대신이신 이역 어른께서 거기에 서 계셨습니다.” 왕은 이역에게 묻자 이역은 소변을 본 것이 아니리 잠시 서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소변 자국이 있는데 왕을 능멸한다면서 사형에 처했다. 「한 치의 벌레에도 닷 푼의 혼이」 「참새가 죽어도 짹 한다」는 말이 있다. 인간성에 상처를 줄 만한 언동은 아무리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도 결코 해서는 안된다. 즉 대통령이 국민들에게, 회
칼럼 생활 선(禪)과 믿음 권우상 명리학자. 역사소설가 우리가 살아가면서 찰나찰나에 우주의 진리 속에서 시공을 초월해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우리의 생활 자체가 행선이자, 과학이고 진리이다. 그것은 바로 찰나찰나에 고정됨이 없이 시공을 넘어서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것을 했을 때, 꼭 집어서 「나」라고 할 것이 없다. 그냥 공했다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 생활 선(禪)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생활이 그대로 선(禪)이요, 진리인 것이다. 이것을 알고 이것을 믿으면 먹고 자고 활동하는 것이 모두 다 선인 것이다. 내가 주인공! 하는 것은 모두가 공했다! 그래서 주인공! 이다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옳으니, 저것이 옳으니, 이것은 참선이고, 저것은 행선이라고 할 것 없이 주인공에게 일임하면서, 그대로 여여하면 참선도 되고 행선도 된다. 더 쉽게 말하면 일상 속에서 일하고 잠자고 식사하고 배설하면서 행선도 하고, 참선도 하는 것이다. 주인공을 「나」라고 고정할 것이 없으니 찰나찰나 한 전체가 공하여 돌아간다는 것을 믿는다면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괴로운 일, 외로운 일, 고달픈 일
칼럼 큰 인물은 언제나 목표가 정해져 있다 권우상 명리학자. 역사소설가 성경에 ‘달란트’의 비유가 나온다. 어느 주인이 세 하인에게 각각 5달란트, 3달란트 1달란트를 맡기고 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와 하인들과 결산하는 이야기다. 주인에게 5달란트와 2달란트 받아 열심히 투자하여 굴려서 곱절로 불린 두 하인은 크게 칭찬을 받고 포상금을 받지만 주인에게 받은 1달란트를 땅속에 묻었다가 그대로 내놓은 하인은 크게 꾸지람을 듣고 1달란트마저 빼앗기고 만다. 이는 강자는 더욱 강해지고 약자는 더욱 약해지며, 더욱 부유해가는 반면에 가난한 자는 더욱 빈곤해 질 수 밖에 없는 인류 생존경쟁의 영원불변의 진리를 말해주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출생한 그 순간만큼은 모두 다 평등하지만 그 다음부터는 거센 세상의 풍랑에 사방에서 몰려오는 포말처럼 ‘평등’은 산산조각 나고 만다. 그러나 빈곤한 환경에서 태어났지만 노력으로 행운을 얻어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풍요롭고 부유한 환경에서 한 순간 쫒겨나는 사람도 있다. 여기에서 큰 인물과 작은 인물로 구별된다. 그렇다면 큰 인물은 어떤 사람이며, 작은 인물은 어떤 사람일까? 큰 인물은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걸출한 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