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적자생존」, 강자만 살아남는 원리 권우상 명리학자. 역사소설가 인간의 생존은 치열한 전쟁과 같다. 일찍이 영국의 생물학자 ‘찰스 다윈’는 모든 생물의 살아남기 위한 싸움을 「생존경쟁」 또는 「적자생존」이라고 표현했으며, 「양육강식」은 생태계의 기본 원리라고 할 수 있겠다. 모든 생물은 생존을 위해 내가 아닌 모든 것들과 부단히 싸우지 않으면 안된다. 개인이든 국가든 가혹한 경쟁에서 이겨내야만 생존할 수 있으니, 삶의 엄숙함과 심각함은 바로 그 점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인류의 모든 역사의 공통점은 분열과 통합의 연쇄반응적인 반복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진화론을 주장한 ‘찰스 다윈’에 의하면 모든 생물은 끓임없이 분열하여 계속 불어나게 마련인데, 분열과 개체군이 만족스럽지 못한 환경속에서 장기적인 종족 보존을 위해서는 부득이 다른 종족과 싸워 이겨야만 한다고 했다. 「적자생존」과 「양육강식」의 논리는 여기에 근거를 둔 것이며, 그 이론은 개인이나 국가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한 사례를 보자. 어떤 사람이 사업능력이 탁월하여 여러 사업체를 거느리게 되었다. 그 기업가는 후손들을 보존하기 위하여 조만간 여러 사업체를 자식들에게 1∼2개씩
칼럼 아직도 깨어나지 못한 국민들 권우상 명리학자. 역사소설가 진(秦)나라 시황제 이름은 영정이며, 장사꾼 여불위의 아들인데 불륜으로 낳았다. 여불위는 전국 위나라 복양(濮陽)의 부유한 상인 집안에서 출생했으며 남다른 장사 수완으로 한나라 수도 양책(陽翟)에서 소금과 비단 등으로 대상인이 되었고 여러 나라를 왕래하며 장사를 하였다. 그는 식견이 높고 견문이 넓어 장사를 하면서도 늘 권력에 관심을 갖고 있어 관료들과도 친분을 쌓았다. 여불위는 조나라 수도 한단(邯鄲)에서 장사를 하고 있을 때 그곳에서 인질 잡혀있던 진나라 공자 영이인(嬴異人)을 만나게 되었다. 그 당시 국가들은 인질을 교환해서 평화를 유지하고 있었다. 힘이 강한 나라에서는 자국에서 중요하지 않은 왕자를, 힘이 약한 나라에서는 태자와 같은 중요한 인물을 보내는 것이 관례였다. 그래서 진나라에서는 영이인을 조나라의 인질로 보낸 것이다. 영이인은 소양왕의 둘째 아들인 안국군의 아들이었는데 태자가 아닌 안국군의 20여 명의 아들 중 한 사람인데다가 안국군에게 버림을 받은 하희 소생의 아들이라 왕위 계승에서도 배제되어 있었다. 영이인은 성품이 매우 어질고 곤궁한 생활을 하면서도 서신을
칼럼 지도자는 지혜를 터득할 줄 알아야 권우상 명리학자. 역사소설가 한 선비가 어느 날 아침 안방에 들어오자 부인이 밤새 정성들여 기운 버선을 내 놓았다. “아 부인, 참 잘 되었구려, 그렇지 않아도 며칠 전부터 새 버선이 있었으면 했는데 고맙소.“ 선비는 새 버선을 집어들고 기쁜 표정으로 신었던 헌 버선을 벗고 새 버선을 신을려고 했다. 그런데 여느 때와는 달리 버선이 작아서 아무리 잡아 당기며 애를 써도 발의 중간 쯤에 걸려 들어가지 않았다. 화가 난 선비는 부인 앞에 홱 던지면서 ”당신 재주는 참 이상한 데가 있어, 마땅히 작아야만 할 곳은 너무 크고 넓어서 헐렁헐렁 해서 영 재미가 없고 커야 할 버선은 이렇게 작게 기워 발이 들어가지 않으니 당신 것은 어째 매사가 이렇게 거꾸로만 되었단 말이오?“ 그러자 부인이 말했다. ”아니 당신 몸은 모두가 다 좋은 줄 아세요? 커야만 좋은 물건은 아무리 만져 키우려고 애를 써도 커지지 않고 크지 않아도 될 발만 쓸데 없이 커서 같은 치수라고 생각하고 기운 버선은 왜 들어가지 않아요? 정말 이상하지 않습니까?“ 두 사람은 부둥켜 안고 웃었다. 에도(江戶) 성안에서 죄를 범한 일곱 명의 무사들에게
칼럼 법적 죄책과 신학적 죄책 권우상 명리학자. 역사소설가 우리 개인과 관련된 현실적인 죄책에는 크게 두 가지 유형이 있다. 첫째 유형은 「법적 죄책(legal guilt)」 혹은 「시민적 죄책(civil guilt)」이다. 만약 우리가 빨간 신호등이나 정지 표시를 무시하고 달리거나 조세 포탈이나 남의 물건을 훔치거나 속도를 위반 할 때 민법 혹은 형법을 어긴 죄에 대한 책임이다. 우리는 이런 일을 하 면서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책임이 있다. 만약 그런 죄로 인해 체포되어 유죄 판결을 받는다면 벌금을 지불하거나 감옥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 고속도로에서 규정 속도를 위반하여 달리던 차들이 저 앞에 경찰차를 발견하고는 갑자기 브레이크를 밟는 것을 보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이것은 옳아서가 아니라 붙잡히거나 처벌을 받는 것이 두려워서 법을 지킨다는 사실이다. 무법성은 자연적인 사람들과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보이는 성향이다. 두 번째의 유형은 인격에 대한 침해다. 하나님의 율법은 그 분의 본질에 대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알 것은 이것이니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칼럼 평민이 황제 자리에 오른 여자 권우상 명리학자. 역사소설가 수 양제(煬帝)는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크게 패하였으나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양저우의 별궁에서 사치스러운 행각을 벌리고 있었다. 지방관리들도 부패하기 짝이 없어 백성들만 곤궁에 빠져 있었다. 내부에서는 고구려 원정의 실패와 엄청난 대토목공사로 인하여 국력이 피폐해져 각지에서 반란군이 일어났으며, 지방 호족들도 독립적인 정부를 세었다. 617년 태원 유수 이연 역시 반란에 가담하였다. 이연이 수나라의 수도인 장안을 했을 때 마침 수양제가 강도에서 우문화급(宇文化及)과 우문지금(宇文智及) 형제에게 암살되자 이연은 국호를 당(唐)으로 하고 스스로 제위에 올랐으며, 건국에 공이 큰 이세민을 진왕(秦王)에 봉했다. 이세민이 반란을 일으켜 수나라 정부군과 싸울 때 목재상으로 많은 돈을 번 무사확(武士彠)은 이세민에게 군자금을 지원해 주었다. 이세민이 왕이 되자 무사확은 유수에 임명되었다. 이때 무사학은 아들이 없어 두 번째 여인과 결혼 했지만 딸만 셋을 낳았다. 셋째 딸 조(粗)은 어릴 때부터 영특하고 얼굴도 예뻤다. 무조(武粗)가 13살 때 이적 장군의 추천으로 궁녀로 입궐하게 되었다.
칼럼 적(敵)을 경영하는 지혜 권우상 명리학자. 역사소설가 다도칸(太田道灌)은 에도 성(江戶城)을 축성한 인물이다. 그는 늘 전쟁에 신경을 쓰야했다. 도칸은 언젠가 대적하고 있는 도시마(豊島) 가문의 작은 성인 고즈쿠에(小机)성을 공격하게 되었다. 고즈쿠 성은 규모가 작기 때문에 적은 수의 병력으로도 충분히 함락시킬 수 있다는 판단에서 도칸은 수백 명의 병력만을 이끌고 출전했다. 하지만 이 사실을 눈치챈 도시마가 서둘러 고즈쿠에 성으로 지원군을 보냈기 때문에 성안의 병력 수는 도칸의 다섯 배 정도가 되어 버렸다. 이 정보가 들어오자 중신들의 얼굴이 어두어졌다. “우리는 소수이고 저쪽은 대군입니다. 승리한다는 보장이 없으니 일단 물러났다가 병력을 증강시켜 다시 공격해야 할 것입니다” 중신들은 그렇게 제안했지만 도칸은 그대로 공격을 명령했다. “지금 물러나면 우리 병사들의 사기가 약화된다. 병력을 증강하여 다시 공격한다 해도 일단 마음속에 자리잡은 공포심은 떨쳐버리기 어렵다. 이대로 공격하기로 한다. 내가 병사들의 사기를 높일 수 있는 길을 만들어 즐 것이니 병사들에게 부르게 하라.” 도칸의 말을 들은 중신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노래
칼럼 변화를 두려워 하지 마라 권우상 명리학자. 역사소설가 “가장 좋은 아이디어를 찾아내어 실행에 옮겨라.” 이것은 잭 웰치가 가장 신봉하고 있는 경영비법이다. “끓임없이 배워라 건방지게 당신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당신만이 진실을 독점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잭 웰치의 이러한 생각은 남다른 데가 있다. 잭 웰치는 GE 그룹의 회장이다. 그는 쇠약해 가는 GE를 회생시켰고 미국에서 가장 역동적인 회사로 탈바꿈 시켜 놓았다. 「비지니스 위크」의 시장 가치 기준을 100기업에서 1위에 끌어 올려 놓았다. 1993년 이후 미국에서 시장 가치 기준 1위였던 GE의 기업 가치는 1997년 12월 31일 당시 2400억 달러이다. 더구나 CE는 미국에서 가장 수익을 많이 내는 기업들 중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위대한 비즈니스 리더는 강성한 에너지의 소유자여야 한다고 잭 웰치는 강조한다. 많은 사람들은 잭 웰치의 경영기법이 무척 어려울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사업은 단순하다. ✦일을 너무 복잡하게 만들지 마라. ✦변화를 두려워 하지마라. ✦관료주의를 타파하라. ✦직원의 두뇌를 활용하라. ✦가장 좋
칼럼 「고려민주연방제」의 무서운 음모 권우상 명리학자. 역사소설가 문재인 좌파정권 이후 북한의 한국 비난, 욕설, 폭언 등이 사라진 모양새다. 문재인 정권의 *북한에 눈치보기 *북한에 비위 맞추기 *북한에 자극하지 않기 *북한에 퍼주기 등의 영향으로 보인다. 그래서 미국의 언론들은 문 대통령을 김정은의 수석 비서라고 말한다. 일본에서 발행하는 월간지 「HANADA」에 북한 김정은에게 충성하는 맹세서와 함께 조선노동당 비밀당원 명단이 공개됐다. 거기에는 다수의 친북좌파 인사들이 포함돼 있고, 문재인 대통령 이름도 있다. 북한에서 일본에 온 탈북자가 제공한 정보라고 한다. 수사기관에선 사실 여부를 조사해야 하지만 침묵하고 있다. 최근 대북제재 품목인 북한산 석탄을 문재인 정부가 반입한 것을 보면 북한에 경제적 도움을 주고 싶은 것이 분명하다. 미북회담도 결렬됐다. 문재인 정부는 사드조차 신속하게 배치하지 않고 환경영향 평가니 뭐니 하면서 뭉기적거리고 있다. 유엔에서 미국이 북한에 대한 제재 수위를 높이고 있지만 문 대통령은 유엔 제재에 동참은 커녕 달갑지 않는 모습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한국전쟁 이후 가장 최악의 위기에 놓여 있다. 한국이 공산
칼럼 성적을 올라가게 하는 비결 권우상 명리학자. 역사소설가 학교 성적이 부진한 학생은 대부분 공부하는 방법이 비능율적인 경우가 많다. 일본에서 명문 대학으로 알려진 동경대학은 전국에서 가장 공부 잘 하는 수재들만이 지원한다. 그런데 소도시의 한 고등학교에서는 동경대학 특별진학반을 만들어 동경대학에 여러명이 합격하여 이 고등학교가 명문으로 부각된 적이 있었다. 특별진학반을 추진한 사람은 이 고등학교 출신인 다니가와(谷川) 변호사다. 우선 희망 대상자 2학년생 20명을 선발하여 스타르타식 교육을 실시했다. 이 학생들은 정규 수업이 끝나면 귀가하지 않고 곧바로 기숙사에서 먹고 자면서 집단생활을 했다. 3개월이 지나면서 학생 7명이 적응하지 못해 포기했다. 다시 2개월이 지나면서 5명이 포기했고, 6개월이 되자 여학생 3명 남학생 5명이 남았다. 8명 중에 인문계열은 5명, 의학계열은 3명이다. 집단생활에 필요한 돈은 다니가와 변호사 개인이 부담했다. 주로 학생들의 식비와 특별히 초빙해 온 3명의 교사 급료다. 이 교사들은 명문 학원에서 가르치는 베트랑 선생님들이었다. 집단교육을 받는 학생들은 대학입시를 치루기 전엔 집에 갈 수 없다. 부모들의
칼럼 인생의 고통이 엮어낸 불후의 명작 권우상 명리학자. 역사소설가 「문장은 서한(西漢)의 양(兩), 사마(司馬)」라는 말이 있다. 양사마는 한부(漢賦)의 대가 사마상여(司馬相如) <태사공서 : 太史公書> 즉 사기(史記)의 작가 사마천을 말한다. 사마천은 역사학자이며 위대한 문학가이다. 그는 만권의 책을 읽었고 만리(萬里)를 여행했다고 한다. 그는 가장 심오한 학문인 하늘과 사람을 궁구하고, 고금의 변화에 통달하였으며, 시대를 초월한 역사가의 최고봉에 오른 인물로 그가 남긴 작품과 더불어 오늘날까지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이런 천재적인 인물을 누가 무슨 이유로 궁형에 처했는가? 궁형이란 남근(男根)을 떼어버리는 형벌로서 부형(腐刑)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떼어낸 자리의 상처에서 썩는 냄새가 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남자가 남자의 구실을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사람이 사람이 아닌 존재가 된다는 가혹한 형벌이기도 하다. 한(韓)나라의 형법상으로는 사형 다음의 형벌이며, 그 굴욕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치명적인 사형에 비할바가 아니다. 사마천은 28세에 아버지를 잃고 사관으로 임명됐다. 그 당시 이릉은 뛰어난 명장이었다. 불
칼럼 지금 현재를 열심히 살아라 권우상 명리학자. 역사소설가 누구보다도 부지런하고 성실한 신혼 부부가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계획을 달성하기로 결심했다. 50세가 되면 퇴직을 하고, 평소에 간절히 염원했던 해외 이민으로 온 가족이 남은 여생을 행복하게 살아간다는 계획이었다. 두 사람은 이 꿈을 위해 돈을 모을려고 악착같이 부업도 하면서 하루 종일 일에만 매달렸다. 너무나 바빠서 어떤 날은 부부간에 대화도 나누지 못한 날도 있었다. 그렇게 해서 돈을 모아 꿈에 그리던 이민을 가게 되었다. 한가롭게 지내는 생활에 익숙하지 않는 두 사람은 하루종일 서로 얼굴을 쳐다보고 무료하게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보니 부부간에 자주 거친 말다툼이 오갔다. 더 이상 견딜 수 없다고 생각한 두 사람은 결국 고국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제야 두 사람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평소에 여유를 누려보지 않는 사람이 한가한 생활을 견디어 내겠는가? 이런 깨달음을 알고 고국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다시 일을 시작했다. 일을 하면서도 가끔 시간이 날 때면 같이 영화관에 가고 공원이나 야외로 산책을 가기도 하면서 두 사람은 여가 생활을 즐겼다.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야
칼럼 군주는 늘 자신의 부족함을 느껴야 한다 권우상 명리학자. 역사소설가 일본 전국시대 오타 도칸은 무장으로 에도 성을 축성한 인물이다. 도칸의 본명은 스케나가(資長)인데 후에 삭발하고 도칸으로 개명했다. 부친의 이름은 스케키요(資靑)이다. 도칸은 어린시절 매우 영리했고 응석받이였는데, 자신의 머리가 뛰어나다는 점을 내세워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자랑하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매우 거만했다. “이대로 내버려두면 올바른 인물이 될 수 없겠어.” 이렇게 판단한 도칸의 아버지는 스케키요는 도칸을 가마쿠라(鎌倉)에 있는 사찰로 보내면서 말했다. “스님에게 교육을 받아 좀 더 기품있는 인간이 되어라” 수행을 끝낸 도칸이 집으로 돌아왔지만 거만한 태도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실망한 아버지는 어느날 도칸을 불러 장지문을 가리켰다. “저 장지문을 보아라” 도칸의 눈이 장지문 쪽으로 향했다. “저 문에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장지문은 곧게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저렇게 서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사람도 장지문처럼 성격이 곧아야 하는 것이야. 만약 장지문이 구부러져 있다면 쓰러져버린다.” 아버지의 말에 도칸은 웃음을 터뜨렸다. “뭐가 우스우냐?” 아버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