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사주추명학자의 “이것이 운명이다” <3>
이것이 운명이다
“엄마 왜 이래.. 누가 엄마를 이렇게 했어.. 말해봐 누군지..”
“아니야 내가 잘못해서 그래.. 내가 실수를 했다구..”
“뭐가 실수야.. 아빠가 삽으로 찍어 맞았자나.. 아빠가 그랬지? 아빠가 맞지?”
“그래 아빠가 찍은 건 맞는데 잠시 화가 난 모양이야..”
“거짓말.. 무슨 화가 나. 엄마가 노래 부른다고 아빠가 일부러 그랬자나..”
윤정이는 몹시 화가 난 얼굴이었다. 나는 일어나 얼굴에서 흐르는 피를 한 손으로 움켜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윤정이를 이끌고 집으로 걸어 갔다. 방안에 들어 온 나는 코피가 나고 눈부위가 찢어진 얼굴을 우선 수건으로 싸메었다. 그리고 휴대폰으로 119 구급대를 불렀다. 잠시후 구급차가 달려와 나는 병원으로 실려 갔다.
병원에서 열 일곱 바늘을 꿰멘 후 병실에 입원한 나는 누워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부부란 것이 무엇인가?
남편이 나에게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이렇게 밖에 할 수 없었는지?
나는 마음속에서 남편에서 오만가지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잠시 노래를 부른다고 이럴 수가 있나 싶어 남편이 몹시 섭섭했다. 아니 섭섭할 정도가 아니라 괫심하기까지 했다. 이제는 헤어질 때가 되었구나 싶었다. 팔자에 없는, 인연이 아닌 남자와 만나 이런 일이 일어났구나 싶었다. 하지만 잘못 만난 악연 치고는 너무나 가슴에 상처가 컸다. 집에서 기르는 개도 보기 싫으면 시장에 내다 팔던가 해야 하듯이 사람도 보기 싫으면 떠나야 하는구나 싶었다.
머리의 상처로 한 달 가량 병원에 입원해 있었지만 남편은 한 번도 문병을 오지 않았다. 가끔 시어머니가 문병을 와 남편의 소식을 물으면 여전히 컴퓨터 게임으로 도박을 하고 있다는 말 뿐이었다. 그러면서 그 책임을 내탓으로 돌렸다. 게다가 시어머니는 남편을 화나게 한 것은 며느리 탓이라고 하면서 나이게 이렇게 말했다.
“여자가 일하다가 노래를 부르니께 니 서방이 화가 난 거 아이가. 기생사당년이 될라꼬 카나 일하다가 노래는 무신 노래고?”
그런데 얼굴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나는 또 다시 심한 복통에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가끔 복통이 있긴 했지만 지금처럼 이렇게 심하게 아파본 적은 없었다. 최근에 와서 생리도 불순하고 생리주기도 일정하지 않았지만 그럴 수도 있거니 생각했는데 통증이 너무 심해 진찰을 해 보니 자궁근중이라고 하였다. 나는 수술을 받느라 얼굴 상처에 이어 다시 개복 수술을 하여 이십 여일간 더 입원하게 되었다.
자궁근종 수술도 끝나고 머리 상처도 아물어 내가 퇴원해서 집에 와보니 남편은 장수연이란 여자와 이미 동거하고 있었다. 이 일로 나는 남편과 자주 다투게 되었고, 남편은 나에게 주먹질과 발길질을 하면서 폭력까지 행사하기 시작했다. 이웃에 사는 장수연은 경남 진해에서 나와 같은 고등학교 같은 반 친구였다. 장수연은 나와 동갑내기로 부모와 함께 나보다 일찍 김천으로 이사왔는데 내가 과수원에서 일을 할 때면 가끔 와서 일을 도와주기도 하면서 내 남편과 서로 알게 되었고. 내가 석달 동안 병원에 입원하고 있는 사이 장수연은 내 남편을 꼬더겨 동거를 해 버렸다.
나는 남편과 10여년 동안 살면서 딸 하나 아들 하나를 낳았다. 딸 이름은 최윤정이고 아들 이름은 최동석이다. 두 아이 양육은 남편이 맡기로 하고 나는 위자료 3천만원만 손에 달랑 쥐고 합의 이혼하여 혼자 경북 경주에 와서 살았다. 이혼 한 사실을 친정 부모님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알리면 마음 고생이 심할까 싶어서였다.
이듬해 나는 이웃에 사는 아줌마의 소개로 조기훈과 결혼했다. 이웃 아줌마는 내가 얼굴도 예쁘고 혼자 살고 있는 걸 보고는 나를 조기훈에게 중매했고, 나는 두 번째로 조기훈과 결혼하였다. 조기훈은 나와 동갑인 총각으로 40살이 넘어도 직업이 없어 장가를 가지 못하고 있다가 나를 만났다.
비록 시골이긴 하지만 이런 남자라면 일생의 동반자로 살아도 괜찮을 것만 같았다. 서울에서 명문대학 법대를 나와 사법시험 준비를 한다면서 직업이 없긴 해도 농토가 있다고 하니 먹고 사는데는 큰 불편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
더구나 시부모 될 사람은 남편에게 뚜렷한 직업이 없자 가게를 하나 차려서 부부가 오붓하게 살도록 해 준다고 하였다. 남자 나이 마흔에 얼굴이 나보다 더 예쁜 여자를 찾다가는 영영 아들을 장가 보내지 못할 것이라는 남자 부모님의 조급함에 조기훈도 얼굴이 예쁜 나를 보자마다 결혼을 한 것이다.
그런데 막상 내가 조기훈과 결혼을 해 보니 이번에도 잘못 결혼했구나 싶었다. 하지만 이미 또 다시 엎어진 물사발 꼴이 되었다. 시부모님이 가게를 내주겠다면서 가게를 알아보려 다니는 것은 경주 변두리 시골에서 코딱지 만한 구멍가게였는데 그것도 얻는다는 시늉만 하고 다녔다. 진실로 가게를 얻어 나와 남편이 먹고 살도록 해주겠다는 마음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다. 아들이 사법시험 합격하기를 바라고 있으니 사법시험에 합격하면 굳이 시골에서 가게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때까지 내 마음을 다독거려 놓기 위해 가게를 얻는다는 시늉만하고 다녔던 것이다. 혹여 내가 남편의 직업이 없어 결혼을 하지 않을까 해서였던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