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조 영조 대왕 때 한양의 남산골에 사는 가난한 선비 장경문은 당쟁으로 몰락한 정승의 후손으로 낡은 집 한 채에 의지하여 죽지 못해 간신히 연명해 가고 있었다.
어느날 민생을 살피고자 암행길에 나섰다가 장경문의 비참한 생활을 본 임금은 사정을 딱하게 여겨 장경문을 제주 목사의 벼슬을 내렸다. 그야말로 파격적인 임명이었다.
장경문은 칙사가 돌아가자 덩실덩실 춤을 출 정도로 감격했으며 그의 부인도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다.
그런데 흥분이 가라앉고 나자 태산같은 걱정이 생겼다. 장경문은 한숨을 푹 쉬며 부인에게 “여보, 제주는 육로로 천리길 뱃길 천리길로 머나 먼 곳이오. 그곳을 어떻게 돈 한푼 없이 부임한단 말이오?” 하고 말했다. 사실 노자는 고사하고 당장 입고 나설 옷 한 변변히 없는 처지였다. 관복은 나라에서 준다해도 먼 제주까지 어떻게 가야 좋을지 앞이 캄캄했다.
장경문은 한숨만 내쉬고 있는데 부인은 좋은 수가 있다고 귀뜸하며 “제주는 옛 탐라국으로써 고장이 다르면 인물도 다르듯 그곳 인심을 예측할 수 없지 않을까 여겨집니다. 그러니 즉시 믿을만 하고 충직한 사람을 몇 명 가려 뽑으세요” 하고 말했다.
“가려서 뽑아라?” “이(吏), 호(戶), 예(禮), 공(工), 병(兵), 형(刑), 육방의 아전을 잘 가려 쓰시면 영감은 손하나 까딱 안해도 되는 것이죠” “글세 대체 어떻게 하란 말씀이오?” “아이 답답해라. 무슨 일이든지 공짜가 있답디까? 사람을 뽑을 때 밑천을 들어야 비장(裨將)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넌지시 귀띔을 하시구려” 장경문은 아내의 말에 무릎을 치며 금방 어두웠던 표정이 밝아졌다.
이때 새우젓 최대 집산지인 마포 서강가에 사는 배서방은 그의 아버지가 새우젓 장사로 전답을 꽤 모아 가세는 넉넉했지만 사람이 워낙 변변치 못한 얼간이 인데다 건달 기질까지 있어 날마다 술과 기생에 빠져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배서방은 돈 천 냥쯤 쓰면 비장 벼슬을 할 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 마음이 솔깃했다. “천냥이라...” 배서방은 새우젓 천 독을 팔아야 벌 수 있는 금액이라 입이 딱 벌어졌다. 하지만 상놈이 벼슬자리를 얻자면 뇌물을 쓰는 방법 밖에는 없다고 생각한 배서방은 그렇게 하기로 했다.
비장을 뽑는 날 장경문은 사랑방 미닫이 문을 열고 거만하게 버티고 앉았다. 면접시험을 보는 젊은이들은 차례를 기다리며 줄을 섰다가 한 사람이 사랑방 댓돌 밑으로 나가면 장경문은 긴 장죽으로 손짓을 하며 인물을 심사하는 것이었다. 배서방 차례가 되었다. 장경문은 “재산은 있느냐?” 하고 물었다.
"벼슬을 하는데 재산이 있어야 합니까?“ ”벼슬아치가 가난하면 반드시 비리가 생기고 백성을 못살게 굴 것이다. 그러므로 재산이 있으면 그런 엉뚱한 마음은 추호도 갖지 않을 것인즉 내 특히 그 점을 참작하여 재산이 있는 자를 비장으로 뽑는 것이다 알겠느냐? 그래 재산은 있느냐?“ ”아비가 새우젓 장수라 벼 천석은 합지요“ ”으흠 그만하면 됐다. 이리 가까이 오너라“
장경문은 가까이 온 배서방에게 조그마한 종이 쪽지를 하나 보여 주었다. 종이에는 이방 900냥, 호방 800냥, 예방 700냥, 공방 600냥, 그리고 다시 행을 바꾸어 형방 800냥, 등등이 쓰여져 있었다.
배서방이 주욱 훑어보니 다른 자리엔 각각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는데 이미 팔렸다는 표시고 예방과 형방만이 빈 자리였다. 장경문이 목소리를 가다듬어 말했다. “보았느냐? 너희도 잘 아다시피 육방 관속 밑에 적힌 금액은 보증금이다. 너희도 알다시피 제주까지 가려면 배를 타야하는데 언제 풍랑을 만나 배가 파선할지 모르는 일이며 또 머나먼 천리 길에는 생각지도 않는 재난일 있을 수도 있다. 그래서 돈을 받아 두었다가 혹여 불상사가 생기면 요긴하게 쓰기 위해서다” 즉 벼슬을 할려면 돈을 쓰라는 것이었다.
벼슬을 하면 어디선가 돈이 생기는 모양이었다. 배서방은 100냥을 더 쓰면 육방의 우두머리 이방을 차지할 수 있는데 벌써 팔려 나갔다니 분하기 짝이 없었지만 할 수 없이 800냥을 주고 형방을 사서 비장(裨將)이 되었다. 역사 이야기에 나오는 배비장이 바로 그 인물이다.
보도에 따르면 지난 19대 총선 과정에서 여.야를 막론하고 공천헌금이 오갔다는 의혹이 제기돼 정가에 태풍의 눈으로 떠오르고 있다. 의혹의 중심에 선 인물은 새누리당 현기환 의원인데 선관위가 검찰에 고발한 모양이다. 비례대표 공천을 둘러싸고 뇌물 논란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18대 총선 과정에서도 모의원이 뇌물로 검찰에 기소된 적이 있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매관매직 행위가 끊이지 않아 씁쓰레한 마음 금할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