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신을 나(我)라고 하여 그에 집착하는 한 이런 비극에서 벗어날 길은 없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소식이 하나 있다. 그것은 우리의 육신은 결코 우리의 참 생명 그 자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애지중지하고 거기에 집착하며 죽기 아니면 살기로 매달려 있는 이 육신은 참 생명의 도구일 뿐이라는 것이다. 육신의 생겨남이 나의 참 생명의 생겨남이 아니며, 육신의 죽음이 나의 참 생명의 죽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찌하여 육신에 그토록 얽매여 지내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오직 한가지 착각에 의한 것일 뿐이란 것이다. 착각이 어찌 진실일 수 있겠는가? 착각은 진실을 알게될 때 그 자취를 감추게 된다. 육신의 한계 곧 생사는 진실 앞에서 그 자취를 감춘다. 이 착각은 어두움인 까닭에 그것을 사라지게 하는 것은 광명이다. 이 광명이 곧 마하반야이다. 부처님의 지혜광명을 의미하며 무한(無限) 촉광(燭光)의 광명이라는 뜻이 된다. 무한 촉광인 까닭에 어떠한 어두움도 존재할 수 없다. 일체의 한계는 곧 울타리이다. 마하반야의 광명 앞에는 울타리 없는 무한 세계가 전개된다. 부처님의 지혜 광명 곧 마하반야의 세계는 그대로 바라밀이다. 바라밀이란 말은 ‘저 언덕에 이른다’고 하여 도피안이라 번역하기도 하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본래부터 생사가 없는 저 언덕에 있어 왔다는 뜻이 된다. 아직도 우리들은 어두운 까닭에 이 바라밀 세계를 오직 신앙으로 파악하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바라밀 신앙의 깊이와 그 강도에 따라 그만큼 우리 생명의 한계는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관념의 세계에서 바라밀을 믿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실생활에서 경험되지 않으면 그 가치가 충분히 드러내지지 않는다. 이 바라밀 신앙을 실생활에서 구체적으로 경험하는 것이 이 보현행원인 것이다. 그러므로 보현행원은 진리 그 자체를 드러내는 실천인 것이다. 보현행원을 해석할 때 ‘나는 아주 잊어버리고 오직 일체 중생을 위하여 산다’고 한다. 바라밀의 세계는 온통 일인칭의 세계인 것이다. 남들과 대립된 나도 없고 나와 대립된 남도 없다. 다시 말하면 남들과 싸우는 나도 없고 나와 싸우는 남들도 없다는 말이다. 남인 듯 여겨졌던 모든 사람은 본래부터 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 남처럼 보이는 나를 해치는 일을 어찌 할 수 있겠는가? 내가 살아가는 것은 그 모든 나를 위하여 살아가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남들과 대립하여 있는 나는 완전히 잊어버리고 모두가 본래부터 남이 아닌 나인 본체 중생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현행원은 바라밀 신앙의 경험적 실천이라고 볼 수 있다. 보현행원은 생명 존중의 극치이다. 현대 사회에서 흔히 논의되고 있는 과제 가운데 인간존중이라는 것이 있다. 참으로 좋은 일이다. 그러나 인간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제대로 밝혀진 일이 있는가? 기껏해야 동물학적인 의미의 인간을 생각해서 그 동물적 본능이나 존중 또는 생리적 생존 연장이나 이 외의 무엇을 현대 인류는 생각하였다는 것인가? 소위 말하는 복지사회라는 것도 그 범위를 벗어남이 아니요, 경영학상의 인간 관계론에서도 조직의 활성화를 위한 수단으로서의 원만한 관계유지가 그 주안점이었을 뿐이다. 그 보다도 근원적이랄 수 있는 교육제도는 어떻다 할 것인가? 참교육이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이 있는가? 무제한의 경영사회에서 남보다 나은 사회적 지위 내지는 물질적 윤택을 추구하게 하는 것이 교육의 실정이라면 그 교육의 결과가 어떠한 사회를 만들어 간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것들은 유물적인 생명관에 입각한 것으로 결국 인간생명의 모욕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인류가 근대화 된 이래 끊임없이 이상으로 추구되어 온 것이 자유와 평등의 동시 실현이다. 인간이 자유를 누리고 살 때 자연스럽게 불평등이 드러난다. 한편 평등을 중시하다 보면 자유가 억압받게 되는 것이 사회적 현실인 것이다. 이러한 모순이 드러나서 인간 세계에는 평화가 깃들 날이 없다. 더구나 요즘은 테러가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다. 모든 투쟁과 갈등, 증오와 저주로부터 해방돼야 한다. 그렇다면 해방될 수 있는 길은 있는가? 그것은 바로 보현행원에서 얻어야 한다. 보현행원에서 가르치는 한 가지는 우리로 하여금 일체의 대립에서 벗어나서 본래의 동일 생명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모든 생명을 물질로 대하지 않고 불성(佛性)으로 그 자체로 보게 하는 것이다. 이 땅에 평화낙원을 건설하는 길이 이 길 말고 달리 무엇이 있겠는가? 보현행원의 실천에는 대전제가 하나 붙는다. 바라밀 신앙이다. 이 신앙을 배우고 실천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