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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칼럼-諸行無常이요 一切改苦이며 諸法無我라

권우상(명리학자. 역사소설가)

 
옛날에 한 부자가 있었는데 그 장자의 집은 크고 넓은 저택이지만 아주 오래된 고가(古家)였다. 어느날 장자가 외출을 하자 그 사이에 불이 났다. 지금 같으면 119에 신고해서 소방차가 오면 불을 끌 수 있지만 그 때는 소방차가 없던 시대라 불이 나면 사람이 손수 물을 퍼다가 끄는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장자가 외출을 하고 돌아와서 집에 불이 난 것을 보고 크게 놀래서 달려가 보니 아직도 불난 집안에서는 어린이들이 천진스럽게 놀고 있었다. 무슨 놀이를 하는지 불난 줄도 모르고 정신없이 노는데만 열중하고 있었던 것이다. 장자는 아이들에게 불이 났으니 빨리 나오라고 소리쳤지만 아이들은 멀뚱멀뚱 쳐다볼뿐 놀이에만 정신을 쏟았다. 아이들은 불의 위험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장자는 안되겠다 싶어 꾀를 냈다. 평소 아이들이 갖고 싶어하던 것이 수레였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큰 소리로 “애들아! 여기 양이 끄는 수레. 사슴이 끄는 수레. 소가 끄는 수레가 있으니 어서 나와서 타고 놀아라” 하고 소리쳤다.

그때서야 불난 집안의 아이들은 얼시구 좋구나 하고 밖으로 뛰쳐 나왔다. 그리하여 아이들은 무사히 그 불난집에서 구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장자는 아이들에게 그들이 평소에 바라던 양수레, 사슴수레. 소수레 대신에 그것들과 비교할 수 없는 아이들이 감히 상상할 수도 없었던 하얀 소가 끄는 큰 수레를 준비하여 두었던 것이다.

장자는 아이들에게 모두 흰소가 끄는 장엄한 수레를 선물하였는데 아이들은 아무도 그들이 바라던 양수레. 사슴수레. 소수레가 아니라고 불평을 하지 않고 오히려 더 좋아서 어쩔줄을 몰라 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바라던 것보다 더 좋은 선물이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화택삼거(火宅三車)라는 유명한 비유로서 묘법법화경에 나오는 이야기다. 이 삼계화택은 바로 우리의 마음속에 탐심(貪心)과 진심(嗔心)과 치심(痴心)이 땔감이 되어서 타오르는 불꽃으로 만든 현실인 것이다. 여기서 장자가 아이들에게 선물한 흰수레나 부처의 말씀인 ‘아눗다라삼약삼보리’는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의 참된 마음이다.

본래의 마음, 깨끗한 마음, 탐진치(貪嗔痴) 삼독(三毒)에 물들지 않는 마음, 번뇌의 불꽃이 조금도 연기를 내지 않는 마음. 이 마음으로 돌아가야만 영원히 변치않은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보조국사는 삼계가 불난 집과 같은데 그 속에 머물러 그 고통을 참고 있겠느냐? 하고 물고는 스스로 그 해답을 주었다.

욕면윤회(慾免輪廻)인데 막약구불(莫若求佛)이요, 약욕구불(若慾求佛)인데는 불칙시심(佛則是心)이라고 하였다. “윤회를 벗어 나고자 하면 부처를 찾아야 하고, 부처를 구한다면 부처는 다름아닌 이 마음이다”라고 한 것이다. 이어서 말하기를 심하원멱(心何源覓)이요 불리신중(佛離身中)이라 하였다. 이 말은 마음을 어찌 멀리서 찾을 것이냐 이 몸을 여의지 않았느니라‘ 하는 뜻이다.

세상이 혼돈하고 험악한 것은 우리의 마음에 삼독심(貪.嗔.痴 3가지 毒)이 가득차 있기 때문인데 이 삼독심만 제거하면 우리는 바로 부처와 똑 같은 진여심(眞如心)을 찾아내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불난 집에 있으면서도 불난 집인줄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앞에 벌어진 험악한 현실을 보면서도 자기 마음 속에서 타오르는 번뇌의 불꽃은 보지를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난 집과 같은 이 괴로움을 벗어나는 길은 오직 한 길뿐이다. 마음을 진정하는 길, 번뇌의 불꽃을 잠들도록 하는 길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가 ‘나(我)’라고 할 때 두 가지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첫째, 내가 나라고 할 때 “나는 영원히 존재한다” 라는 것을 전제하고 말하는 것이다. 변해버리면 절대 나라고 하지 않는다.

두 번째는 내가 나라고 할 때 ‘나만큼은 ‘나(我)’를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을 때 나라고 부른다. 통괄하고 주관하고 자기 뜻대로 하는 것을 주재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 두 가지를 갖춰야 ‘나(我)’라고 하는데 과연 육근(六根)이 상일성(常日性)을 갖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변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그런 사람은 없다. 태어나면서부터 성장하고 죽을 때가지 끝없이 변화한다. 이렇게 변한다는 것은 상일성이 없다는 것이 무상(無常)하다는 것이다.

세 번째, 무엇이든 내 뜻대로 할 수 있을까? 내 뜻대로 내 마음대로 좋아질 수 없다. 내 뜻대로 안 되는 걸 보고 우리는 괴롭다고 한다. 자기 뜻대로 뭐든지 할 수 있다면 괴롭다는 말은 하지 않을 것이다. 살고 싶은 것이 자기 뜻인데 병들어 죽어야 하니 괴로운 것이고, 자기 뜻대로 안되니까 늙는 것도 괴로운 것이다.

이처럼 상일성과 주재성을 갖춰야 ‘나(我)’라고 할 수 있는데 상일성도 없고 주재성도 없으니 나라고 할 수 없고, 할 수 없는 것을 무아(無我)라고 한다. 이와 같이 인간은 무상하므로 괴롭고, 괴롭기 때문에 ‘나(我)’라고 할 수 없다는 속성이 육근에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육근에도 그 속성이 들어 있다. 육근도 다 변한다. 변하지 않는 육근은 없다. 다이아몬드도 변한다. 그래서 모든 것은 무상하고 괴롭고 그래서 ‘내가 아니다’라는 것을 무엇이라고 할까? 제행무상(諸行無常)이요 일체개고(一切皆苦)이며 제법무아(諸法無我)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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