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탄이 떨어져 일본의 전의가 상실되자 지금이 챙길 때다 싶어 8월 8일 대일 선전포고를 함과 동시에 만주와 북한으로 진격하여 8월 24일 북한을 점령하고 35살의 젊은 김일성을 앞세워 1946년 2월 8일 북한에 임시정부를 세우고 8개 부처로 구성된 공산세력을 만들어 토지 국유화와 산업 국유화를 단행했다. 이렇게 해서 북한은 소련의 앞잡이 괴뢰가 되어 오늘날 공산 독재체제 왕조의 기반을 닦았다. 그리고 그 왕조는 세계 어디에도 없는 3대 세습 왕조로 유지돼 오고 있다. 반면 이승만은 미국을 움직여가면서 남한 사회를 통제했던 공사주의자들을 숙청하고 이 나라에 3권이 분립된 미국식 민주주의의 기반을 닦았다. 만일 이승만 대통령이 다부지게 시국을 다 잡으면서 이런 민주주의의 기반을 설치하지 않고 우왕좌왕 했더라면 4.19 세력은 시위할 공간을 갖지 못하고 김일성 공산집단에 의해 사살되거나 아오지 탄광으로 가는 트럭에 탔을지도 모른다. 이런 사실을 안다면 이승만을 독재자로 비판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승만이 미국에서 귀국하는 시기는 1945년 10월 16일 당시 나이가 71세였다. 그리고 그는 73세의 노구를 이끌고 1948년 국회에서 거의 만장일치로 대통령에 선출됐다. 1960년 그는 86세의 고령이었다. 그는 3.15 부정선거를 명령하지도 않았고 학생들에게 발포를 명령하지도 않았다. 학생들에게 발포한 사람은 당시 내무부 장관이었던 최인규였다. 이승만은 학생의 시위가 격화돼 경무대에 함성이 들리자 최인규에게 저 소리가 무슨 소리냐고 묻었고 그 때까지도 최인규는 이승만에게 학생의 시위가 아니라 노동자들이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소리라고 속였다고 한다. 결국 유혈사태가 발생하고서야 비로소 이기붕과 최인규의 잘못을 알았고 그는 그 책임을 지고 학생들의 기개를 칭찬하면서 순순히 미국으로 망명했다. 여기까지만 봐도 이승만은 독재자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만일 그가 김일성처럼 빨갱이 사상을 가졌다면 그는 절대로 물러나지 않고 김일성처럼 시위학생들을 처형하거나 잡아서 탄광으로 보냈을 것이다. 이런것만 봐도 이승만은 민주주의의 선구자임이 분명하다. 물론 그가 측근들을 잘못 기용한 것은 맞지만 그를 독재자로 몰아 세우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런데 일부 보도를 보면 이승만을 독재자로 보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다. 시위는 용기만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다. 그것이 큰 자랑이 될 수는 없다. 이 나라에는 시위보다 더 엄청난 기여를 하고도 말없이 국가의 장래를 지켜보는 사람들이 많다. 시위에 한번 나섰다고 영웅이 된 것처럼 날뛰는 것은 옳지 않다. 솔직히 말해서 20대의 젊은 혈기라면 시위에 나서서 돌을 던지고 고함을 지르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전국적으로 많은 학생들이 4.19 시위대처럼 젊은 혈기와 의협심을 발산했다. 당시 이승만은 세계 지도자 가운데 학력이 가장 뛰어난 최고의 지성인이었다. 그래서 어수룩한 미국의 힘을 눈부시게 활용하여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의 기틀을 마련한 것이다. 부정선거는 시대의 산물이다. 부정선거는 지금도 있을 수 있다. 이기붕과 최인규와 정치깡패들이 저지른 사소한 일을 침소봉대(針小棒大)하여 ‘김일성 왕조에 나라를 빼앗기지 않고 민주주의 국가체제를 구축해준 국부’를 시위대 학생들의 발밑에 깔고 뭉갠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다. 4.19 세력이 제대로 된 사고방식과 사상을 가지고 있다면 이승만 대통령이 닦아 놓은 민주주의 기틀에 대해서는 후한 점수를 주는 것이 맞다. 1960년 4월 11일 MBC는 마산 앞바다에서 최루탄이 눈부위에 박혀 있는 김주열(마산상고)의 시체가 떠올랐다는 방송을 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4. 19가 촉발됐다. 그런데 한가지 의문 점은 최루탄은 곡사포처럼 공중으로 쏘지 사람의 얼굴을 조준하여 직사포처럼 쏘지 않는다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김주열의 눈덩이에는 최루탄이 아주 깊이 박혀 바다속에서 오랜 동안 파도에 부딪히면서도 빠져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과학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그렇다면 혹여 간첩들이 시위를 촉발시키기 위해 김주열을 그렇게 하지 않았는지 의문이다. 서울농대 학생 김상진은 1975년 유신체제와 긴급조치를 반대한다며 분산 자살을 했고 이로 인해 1970년대의 학생시위가 다시 타오르기 시작했다. 친북좌파 김대중은 바로 이런 희생자들이 또 다시 등장하여 혁명의 불을 지펴야 한다고 선동했고 선동은 1980년 5월의 무법천지를 이끌어 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