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11월 22일에 사적 제258호로 지정된 대성당은 1만 442m2의 땅위에 건평은 1천 498m2이다. 1898년 프랑스 코스트 신부가 축성 봉헌한 이래 성당을 중심으로 수녀원, 문화원, 교육관, 계성여고 등 카톨릭과 관련된 집합 건물을 모두 합하면 명동 전체를 양쪽으로 분할할 만한 규모로 면적이 방대하다. 명동 대성당을 풍수지리적으로 풀이하기 전에 땅의 내력을 살펴 보자. 원래 이 땅은 조선 순조대왕(1801- 1834) 당시 벼슬을 지낸 윤정현이 살던 집터로 바깥채만 60여 간에 달할 만큼 엄청난 규모의 집터 자리였다. 조선시대 벼슬아치들은 집을 지을 때 풍수지리를 보는 것은 기본이다. 따라서 이 집터도 풍수지리를 봐서 지었을 것이다. 더구나 판서(判書)의 높은 지위까지 오른 고관대작의 경우 저택을 지으면서 명당자리가 아닌 땅에 짓는 경우는 거의 없어 이 땅도 명당자리로 보인다. 이처럼 역사적 배경으로 봐도 명동 대성당은 길지(吉地)가 분명해 보인다. 문제는 기도원과 집터의 길지(吉地)는 다르다는 것이다. 성당을 축성할 때 조선왕실에서는 풍수지리적인 이유를 들어 작업 중지와 함께 소유권 포기를 강력하게 요구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성당 자리가 역대 임금의 영정을 봉안한 영희전(永禧殿)의 주맥(主脈)에 해당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833년 땅을 매입한 뒤 1877년 본격적인 정지작업에 들어갔으나 3년간 계속된 왕실과의 분쟁으로 공사는 중단됐다가 프랑스 공사관 중재로 다시 착공해 본당 길이 69m, 너비 28m, 지붕 높이 23m, 종탑 높이 4.5m의 라틴 삼랑식(三廊式) 구조의 순수 고딕양식 건물을 완공했다. 조선왕조 정궁인 경복궁을 마주보며 서울을 압도하는 대성당의 풍수적 판단은 예수가 탄생한 마굿간을 형상화 하여 해마다 저물어 가는 한 해를 밝히는 성당 출입문 지점이다. 이 지점은 풍수지리로 보면 병좌임향(丙坐壬向)의 정북향(正北向)에 가까운 좌형이다. 이는 많은 사람들이 북향집을 꺼린다는 일반적인 풍수개념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일반 사람들은 대부분 햇볕이 잘 드는 남향집을 선호하지만 풍수지리적으로는 반드시 그렇지 않다. 집 뒤의 산과 집 앞에 물길이 배치되는 배산임수(背山臨水)를 철저히 가리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땅의 고저(高低)와 물형에 따라 좌향이 달라지는 이유에서다. 명동 대성당이 남향을 위해 남산을 바라봤다면 어찌 되었을까? 등 뒤에 청계천은 배수(背水)의 물길이 되고 말 것이다. 흔히 전쟁에서는 결사항전으로 배수진(背水陣)을 친다고 하지만 일반인이 생활에 죽을 각오로 살아갈 일은 거의 없다. 또한 배산격(背山格)인 북악산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운기가 발복에 미치는 영향은 거의 없고 안산(案山)격인 남산은 가깝게 가로 막고 있어 인덕(人德)이 없는 형국이다. 그래선지 군부독재 시절에는 민주화를 외치는 노동자의 투쟁장소로 이용되기도 했다. 물형법으로 보면 명동 대성당의 풍수지리환경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다. 좌청룡격인 로얄호텔과 전국은행연합회 건물 등이 성당을 잘 보위하고 있어 명성과 위험이 더욱 견고해질 것으로 보인다. 특히 대성당 후원의 성모 마리아상이 있는 낮은 구릉을 보면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본당 방향으로 치켜 올라가는 비룡승천(飛龍昇天)의 지세를 보이고 있는데 그 위에 본당이 세워졌다. 용은 비바람이 휘몰아쳐야 승천하는데 이곳은 고개 위에서 사방의 풍우(風雨)가 비룡(飛龍)을 도와주는 형국이다. 다만 지세가 높아 멀리서도 우러러 보게 되지만 살풍(殺風)은 우려해야 할 것이다. 군부독재시절 민주화 투쟁의 본거지로 이용되었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런 땅은 기도원이나 포교원으로는 적합하지만 일반인이 거주하는 집터로는 적합하지 않다. 기(氣)가 세면 집터로는 적합하기 않기 때문이다. 우주공간에는 불가사의한 일들이 수 없이 많이 존재하며 이를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것들이 많이 있다. 때로는 현대 첨단과학을 아연실색케 하는 일들이 얼마든지 있다. 이와 같은 것은 유신론적인 영적세계의 동기감응(同氣感應)이나 동경(憧憬)에서 오는 영적(靈的)인 반응으로 볼 수 있다. 이와 더불어 샤머니즘이나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오늘날의 종교를 통하여 만사형통을 비는 기복정신(祈福情神)은 부인할 수 없는 영적 세계의 신(神)의 존재를 입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과학과 비과학이 공존하는 우주공간에는 모든 물체가 제각기 다른 원소로 구성되어 있으면 그 개체는 나름대로 운동력의 힘(Energy)을 가지고 있다. 백자천손(百子天孫)에 부귀쌍전(富貴雙全)을 가져다 주는 명당대지는 천장지비일석지지(天藏地泌一席之地)라 하며 덕망이 있고 적선을 많이 행한 사람에게 하늘이 내려 주는 것이라 천지신명은 유덕한 주인을 기다리며 부덕지인(不德之人)에게는 명당이 명당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 권우상 작가 작품 활동 사항 *權成海(권성해), 권우상(權禹相) 두 가지 이름으로 작품활동을 하고 있음. 본명은 권우상. 호는 成海이며 필명이기도함. *日本國 廣島市에서 출생하여 유년기를 보냄. 1959년 월간지 ‘야담과 실화’ 및 ‘명랑’에 단편소설공모 당선으로 등단. 작품활동 51년(1959년 - 2010년). 주로 신문에 역사소설을 쓰는 작가. 명리학자(역술가). 시, 수필, 동시 등 아동문학에도 등단. *권성해명리학연구소 대표. 발표작 : 장편소설 <발가벗은 여자> <여자는 세 번 태어난다> <동명성왕의 후예> <봉이 김선달> <배비장> <박혁거세> <오성과 한음> <김삿갓> 등 15편. 대하소설 : <삼국패왕지> <제7의 왕국> <말띠 여자> <주몽의 후예> 등 4편. 그외 중, 단편소설, 시, 동시, 동화, 수필 등 문학작품 6,000여 편과 칼럼. 시론 등 5,000여 편을 발표함. *양산신문에 2004년 6월부터 2010년 10월까지 6년간 칼럼과 장편소설을 연재 발표했으며 현재 장편소설 <박혁거세>를 연재 발표하고 있음. *울산광역일보에 2004년 3월부터 2009년 5월까지 5년간 역학 칼럼 <부자팔자 거지팔자>를 집필했으면 다수의 연재소설과 시론과 칼럼을 발표하였음. *현재 일간신문에 연재중인 장편소설은 매일경남 <대왕열전> 창원일보 <말띠 여자> 양산신문 <박혁거세> ※외부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수도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