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광복절에 되돌아 보는 대동아공영권 권우상 사주추명학자. 역사소설가. 극작가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은 쇼와시대(昭和時代) 일본제국 정부와 일본군에 의해 창안되었다. 점령지의 아시아인들에게 동아시아보다 더 큰 영역에서의 동북아시아, 동남아시아, 오세아니아의 문화적, 경제적 통합이라고 선전된 개념이며 “일본에 의해 주도되고 서방세력에 독립된 자급자족적인 아시아 각국의 군사적, 경제적 동맹 블록”을 만들고자 하는 욕망을 표현한 것인데 당시 일본의 외무대신 아리타 하치로(有田八郞)가 1940년(6월 29일)에 라디오 연설을 통해 “국제 정세와 일본의 위치”란 제목에서 선언했다. 즉 ‘대동아’란 말은 1940년에 나왔으며 그 전(1939년)에는 ‘동아신질서(東亞新秩序)’라고 했다. 중국, 인도가 동남아의 문화중심국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일본이 서양의 신문명을 받아들이면서 동아시아에서 문명국으로 부상하자 중국, 인도 등을 야만국으로 여기게 되었고, 서구 제국주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워져 번영과 평화, 자유를 누릴 아시아 국가들의 ‘공영(共榮)’을 찾기 위해 새 국제질서를 만드는 것이었다. 청~일전쟁은 여기에서 발발한 것이다. 즉 중국 시장에서의 일본의 공식적인
칼럼 파이팅의 어원(語源)을 아는가? 권우상 사주추명학자. 역사소설가. 극작가 운동경기나 경연장 또는 연말 연시 회사 직원들의 모임이나 시무식에서 빼놓을 수 없는 구호가 ‘파이팅’이다. 그런데 새로운 각오와 결의를 다지는 ‘파이팅’이란 말의 뜻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운동경기나 경연장 또는 회사 직원들의 모임이나 회식자리에서 한 팔을 높이 치켜들거나 술잔을 쥔 손을 들고 건배를 하면서 ‘싸우자’ ‘힘내자’ 라는 뜻으로 언제부터인가 그 어원의 모호함은 그렇다치고 뜻을 알 수 없는 국적불명의 구호인 ‘파이팅(fighting)'은 미국이나 영국 등 영어권 사람들에게는 무슨 말인지 통하지 않는 말이다. 영어에서 ‘파이팅’이란 말은 호전적인 뜻으로 ‘투쟁하자’ '싸우자‘ ’쟁취하자‘는 뜻이다. 따라서 있는 힘을 다해 ’이기자‘ ’승리하자‘ 라는 뜻으로 말할 때는 ’고 투 잇(Go to it‘) 이라고 쓰고 있다.‘ 어려움을 잘 참고 극복해서 계속 분발하자‘는 뜻으로 사용하는 속어로 ’키프 잇 엎(keep it up)'을 쓴다. 그러니까 ‘파이팅’은 출처가 모호한 엉터리 영어인 것이다. 그런데도 이런 엉터리 영어를 화합을 다지거나 새로운 각오와 결의를 다짐하는
칼럼 이 세상에는 선과 악이 공존한다 권우상 사주추명학자. 역사소설가. 극작가 밤이 가고 새벽이 오면 사람은 깊은 잠에서 깨어난다는 것이다. 만일 깨어남이 없다면 살아 있는 목숨이 아니다. 그러므로 살아 있기에 깨어난다. 깨어남은 즐거움이다. 이 깨어남이 오늘도 내일도 반복되는 순간이 인생이다. 사람은 잠시라도 수면의 긴 굴속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영영 갇혀 있는 상태를 죽음이라고 한다. 이렇게 밤이 되면 자고 새벽이 되어 깨어남을 향수하게 되는 기쁨은 어디에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행복한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새벽이 되어 깨어남으로부터 시작되는 일이 있다. 입놀림이다. 말을 하는 것이다. 하루의 일과는 깊은 흐름의 연속이지만 말을 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런데 깨어난 아침에 자기 스스로 무슨 말을 맨 먼저 했는가에 대해 명확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그저 잠꼬대의 연속에서 일어나야 한다는 의지를 강조하면서도 확실하게 자기 스스로 무슨 말을 하였는지 모른다. 우리는 새벽에 깨어나면서 자기 발신의 목소리를 깨우쳐 아는 공부를 해야 할 것이다. 불도의 구도자는 그 첫 음성이 옴(唵 : om)이 되게 하였다. 옴(唵)은 완성
칼럼 항상 내 마음을 알고 살아 가자 권우상 사주추명학자. 역사소설가 불교는 삿된 생각을 버리고, 욕망을 억제하고, 마음을 청명하게 하는 수행법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는 마음을 깨달음으로 바꾸는 길을 가르친다. 그래서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아무리 작은 미물이라도 생명체는 소중하며, 그것이 유일한 존재로서의 가치가 있는 것이다. 모든 생명체는 서로 상관 관계의 산물로 존재하였다가 그 상관 관계의 힘이 소멸하면 그 존재의 모양을 바꾸게 된다. 하지만 그 존재의 모양을 바꾸었다고 해서 그 존재를 구성한 요소들이 완전히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본래의 요소로 환원하였다가 세력이 생기면 앞서의 존재로 나오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원인과 조건 그리고 결과가 서로 서로 무한이 연속된 세력을 갖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어떤 절대자가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결합의 원리가 미묘하게 작용하는 것을 불교에서는 ‘연기의 세력’이라고 한다. 이러한 연기사상을 배경으로 불교는 이 세상의 현실을 세가지 측면에서 보고 있다. 즉 삼법인(三法印)이라는 것이다. 이 세상의 현 실태를 세가지 방면으로 완전하게 파악하여 확인하자는 것이다. 그 첫 번째가 제행무상(諸行無
칼럼 내가 죽으면 그 명당 자리에 묻어 다오 권우상 사주추명학자. 역사소설가 한 선비가 밤에 아내와 누워 아내 몸을 풍수자리의 명당자리에 견주어 농담을 시작했다. “여기가 발룡(發龍) : 산줄기의 시작 봉우리) 지역이로구나” 하고는 “동쪽 서쪽으로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가 잘 형성되어 뻗어 있네.” 그리고 더 아래로 배 밑을 더듬어 내려가서 “아, 금성(金星)이 중심지를 잘 보호하고 있네.” 하고 말했다. 그리고 선비는 아내의 몸 위에 엎드려 운동을 시작하면서는 흥분이 태산을 넘어 구름 위에 올라설 무렵이 되어 이렇게 말했다. “내 지금 결국(結局 : 묘의 봉우리를 만듬)을 반성하고 그리고 나성(羅星 : 여러 봉우리)를 잡아서 마지막 수구(水口)를 막는 중이오!.” 이때 옆방에서 이 말을 처음부터 다 듣고 있던 선비의 아버지가 크게 소리쳤다. “얘, 애비야! 거기가 어느 산인지는 몰라도 그렇게 잘 갖추어진 명당 자리가 있거던 눈여겨 잘 봐 두었다가 내가 죽으면 그 자리에 묻어다오.” 이 말을 들은 선비는 한창 흥분이 고조되었다가 갑자기 거품처럼 가라 앉으면서 슬그머니 작업을 끝내고 말았다. 풍수지리학에서 명당 자리란 것은 시체를 매장하는 것으로 유골
칼럼 공동체의식, 집단 이익과 권위 존중해야 권우상 사주추명학자. 역사소설가. 극작가 지난해 사건으로 기억된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어느 시(市)의 한 아파트 외벽에서 작업을 하던 인부가 추락해 사망했다. 15층에 살던 아파트 주민이 음악소리가 시끄럽다는 이유로 밧줄을 끊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일시적 분노와 감정을 조절하지 못해 심각한 범죄로 이어지는 사례가 적지 않다. 6년전 내가 경남 양산시 동면 석산리의 단독주택에 거주할 때 집 대문앞에 수시로 승용차를 주차하는 젊은이에게 다른 곳으로 차를 옮겨달라고 하자 “도로가 니네 땅이냐”고 하면서 욕설을 하는 일이 있는가 하면 인근 공터에 쓰레기를 투기하고 소각하자 삼가해 달라고 하자 xxx라면서 욕설을 하는 일도 있었다. 빈번하게 이런 일을 당한 나는 마음이 몹시 상해 양산시 민원을 냈고, 경찰지구대에 찾아가서 모욕죄에 해당지 여부를 상담한 적이 있었다. (내가 계산해 아파트보다 단독주택이 불편한 점이 더 많아 아파트로 이주했다) 얼핏보면 사소한 일 같지만 우리나라가 민주화 과정을 거치면서 자유와 방종을 얼마나 혼돈하고 있는지를 잘 말해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아닌가 싶다. 고속도로상에서 보복운전도 사회문제가 되고
칼럼 손을 잡는 북한~벨라루스 두 독재국가 권우상 사주추명학자. 역사소설가. 극작가 벨라루스는 동유럽에 위치한 내륙국으로 러시아, 우크라이나, 폴란드, 리투아니아, 라트비아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국가다. 수도인 최대 도시는 민스크(Мінск, Minsk)다. 1995년 국민투표는 알렉산드르 루카셴코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중요한 시기로, 루카셴카는 소련 시대에 대한 향수를 국기에 적극적으로 활용하였으며, 그는 1년 후 실시한 국민투표에서 승리한 후 2023년 지금까지 독재 정치를 하고 있다. 알렉산드르 루카셴코는 벨라루스의 민주주의 운동을 자신의 권력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고 있다. 벨라루스의 알렉산드로 루카셴코 대통령이 벨라루스를 유럽의 북한으로 만들고 있다고 벨라루스 야권 지도자인 스뱌틀라나 치하노우스카야 씨가 비난했다. VOA에 따르면 리투아니아에 망명한 벨라루스 야권 지도자 스뱌틀라나 치하노우스카야 씨는 막심 리젠코프 외무장관이 이끄는 벨라루스 대표단의 평양 방문에 대해 “매우 우려스럽다”며 “이는 단순한 외교적 제스처가 아니라 벨라루스가 민주주의 규범에서 더욱 고립되고 전 세계 다른 독재 정권과의 관계를 심화하고 있다는 명백한 징후”라고 지적하면서
농부는 작물을 가꾸는데 온갖 정성을 다한다. 싹이 트고 자라 꽃이 피고 열매를 맺기까지는 수십 번의 손길이 필요하다. 그런데 농부는 매일매일 정성을 다할 뿐 조금도 조급해 하거나 서두르지 않는다. 왜냐하면 작물이 성장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교육도 이런 원리 속에서 이뤄져야 한다. 농부는 1년을 기다리지만 교육은 최소한 16년 이상을 기다려야 한다. 그러므로 아이가 언젠가는 훌륭한 인재가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매일매일 정성을 다해 사랑으로 보살펴야 한다. 생활이 교육이고 교육이 생활이라는 말과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라는 말을 명심해야 한다. 관자는 1년을 생각하면 벼를 심고, 10년을 생각하면 나무를 심고, 100년을 생각하면 사람을 심어야 한다고 하였고, 하나를 심어서 하나를 얻는 것이 벼이고, 하나를 심어서 열을 얻는 것이 나무이고, 하나를 심어서 백을 얻는 것이 사람이라고 하였다. 가을에 거두어들일 것이 많기 위해서는 봄과 여름에 쉼 없이 일하며 곡식이 병에 걸리지 않고 잘 자라는지 늘 정성으로 보살펴야 하듯이 자식농사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자식은 온실 속의 화초처럼 키워선 안 되며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강하게 키워야 된다. 자식에게
칼럼 도끼를 잃은 농부의 지각(知覺) 변동 권우상 사주추명학자. 역사소설가 속담에 동쪽에서 빰맞고 서쪽에서 화풀이 한다는 말이 있다. 대표적인 사례를 보자. 옛날 어느 마을에 한 농부가 도끼를 잃었다. 그런데 농부는 틀림없이 옆 집에 사는 젊은이가 훔쳤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농부는 옆집 젊은이의 거동을 매일 유심히 살펴 보았는데 길을 걷는 모양이나, 말하는 목소리나 거의 일거일동이 다 자기의 도끼를 훔친 사람처럼 보였다. 농부는 틀림없이 그 젊은이가 도끼를 훔친 장본인이 맞다고 판단하고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 후 며칠이 지나서 농부는 산에 갔다가 잃었던 도끼를 찾아냈다. 며칠 전에 산에 가서 나무를 하다가 깜빡 잊고 도끼를 그 곳에 두고 왔던 것이다. 며칠 후 농부는 다시 옆집에 사는 젊은이를 만나게 되었다. 그날도 젊은이의 이모저모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길을 걷는 모양이나 말하는 목소리나 거의 일거수 일투족이 다 자기의 도끼를 훔친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지각(知覺 : 알아서 깨달음, 그런 능력)에 변동이 생긴 것이다. 그렇다면 이 농부는 같은 사람인데 왜 이렇게 생각에 차이가 났던 것일까? 농부는 자기의 주관적 억측으로 좋은 사람을 한 때 도적
칼럼 돌아가는 삶의 수레바퀴가 멈출 때 권우상 사주추명학자. 역사소설가. 극작가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저서 ‘인생철학’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직접적인 목적은 괴로움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를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삶에 따르기 마련인 괴로움과 세상에 가득한 걱정과 근심이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며 삶의 목적 자체가 아니라고 여기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에 특수한 개별적인 불행은 예외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세상은 어디에나 불행으로 가득차 있다.”고 말한다. 인간에게는 영원한 행복은 없지만 순간적인 안락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인간에게는 두 손이 있으니 일을 해야 하고, 두 다리가 있으니 걸어다녀야 하고, 두 눈이 있으니 봐야 하고, 귀가 있으니 들어야 하고, 입이 있으니 말을 해야 하는데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는 인간의 능력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폐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옛날에 조수에 의해서 밀려 황금이 올라오는 아침이 오는데 그것도 인간이 아침 일찍 일어나서 건져 올려야 한다는 말이 있다. 중국인은 옛부터 재물신이 재물을 가져다 준다고 믿는다. 그렇지만 재물신이 재물을 가져다 줘도 예의를 바르게 갖춰 나
칼럼 내 옆의 행복이 추구할 가치가 있다 권우상 사주추명학자. 역사소설가. 극작가 불교에는 경전뿐만 아니라 부처님과 연관된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자주 만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불교의 묘미에 이따금 감탄을 금치 못한다. 어느 산속에 ‘대각사’라는 사찰이 있었다. 이 사찰에는 향을 우고 예불을 올리는 사람들로 늘 북적댔다. 대들보에는 거미 한 마리가 그물을 지어 살고 있었다. 천년동안 매일 향을 맡으며 수련을 한 거미는 불심이 쌓이기 시작했다. 부처님이 향이 자욱한 것을 보고 사람들의 깊은 신심을 기뻐했다. 부처님은 거미를 발견하고 물었다. “너와 내가 서로 만난 것도 인연일 것이다. 보아하니 너는 천년동안 수련을 했나 보구나. 내가 한 가지 질문은 할테니 대답해 보아라.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거미가 대답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얻지 못한 것’과 ‘막 잃어버린 것’입니다.” 부처님이 떠나고 천년의 시간이 지났다. 거미는 여전히 사찰의 대들보 위에서 수련을 계속하면서 불심을 쌓았다. 부처님이 다시 사찰에 와서 거미에게 말했다. “그동안 잘 지냈느냐? 천년 전에 내가 여기에서 물었던 그 질문을 기억하느냐?“ “예.” “그렇
칼럼 고통스러운 육신에 기쁨을 주는 불교로 권우상 사주추명학자. 역사소설가. 극작가 생활의 지혜라는 말은 흔히 듣지만 종교의 지혜라는 말은 생소한 어감을 준다. 세속 생활에도 지혜스러움이 있어야 그 생활이 윤택하게 된다면 출세간적인 생활에 있어서는 더욱 더 지혜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종교생활의 예지라는 어감에 더욱 친근감이 내포되어야 함에도 소원한 느낌을 주는 것은 우리들이 종교생활은 깊이 하지만 종교의 지혜를 가까이 하지 않음에 있는 것이다. 단적으로 표현하면 신앙은 하지만 신앙에서 비춰주는 그 빛살을 잘 수용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종교란 지혜생활의 종합이다. 종교에 있어서 믿음을 연속시키게 하는 것은 지혜의 빛으로 일체를 비추고 그늘진 곳이나 어두운 곳을 찾는 손길이 있어야 한다. 종교인이 처음이나 끝이나 항상 가깝게 하고 그것에 친해져야 할 것은 계율의 생활화이다. 이것이 없다면 종교적 생명 가치나 예지가 싹틀 수 없다. 종교적 생활 즉 지엄한 계체(戒體)에 자기를 담아보지 않는 사람은 그 계책에서 품어 나오는 계향(戒香)이 있을 수 없다. 계체의 쓰임새 또는 계체의 향기가 온 몸에 배이고 그 배인 것이 주변에 훈습할 때 종교적 향기가 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