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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ㆍ예술

권우상 명작 단편소설 = 팔자(八字)

 

 

 

 

권우상 명작 단편소설 = 팔자(八字)

 

 

                           팔자(八字)

 

 

나는 어머니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말할 용기도 없고 하기도 싫었다. 나는 갑자기 바보가 된 듯 멍청해졌다. 사람이 싫었다. 대인기피증이라고 할까... 아버지도 싫었고, 어머니도 싫었다. 그리고 친구도 싫었다. 대학동창이니 선배니 하는 것도 모두 다 싫었다. 나는 온종일 방안에만 들어박혀 밖엔 나가지 않았다. 마음이 우울하고 세상이 싫었다. 모두가 도둑놈이고 사기꾼이고 강도처럼 보였다. 나처럼 사기 결혼에 당해보지 않는 여자는 아무도 내 마음을 몰라... 누가 내 마음을 알까...

내 행동이 이상해 진 것을 본 어머니는 잠시도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반드시 외출해야 할 일이 생기면 나를 방안에 가두어 놓고 문을 꼭꼭 걸어 잠구었다. 그래도 나는 그것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그렇게 혼자 있는 것이 좋았다. 사람들이 무섭고 온통 나를 해치는 사람들만 북적거리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가끔 정신이 핑 돌았다. 미칠 것 같았다. 그날 저녁 거실에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하시는 말씀이 내 귀에 들렸다.

“우리 예진일 어찌하면 좋겠어요. 아무래도 심한 우울증에 걸린 것 같아요. 이러다가는 정신병에 걸리지 않을까 걱정이예요.”

어머니의 말에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아무래도 이 옥천에 그냥 둬서는 안될 것 같소, 외가 집이 있는 곳으로 가서 정서적으로 휴양을 하도록 해야겠소.”

외가 집이란 충북 앙성에 있는 마을을 말했다. 거기가 우리 외가 집이었다.

“거기에다 작은 전원주택을 하나 지어 당분간 예진일 거기에 가서 살도록 해야겠소.”

어머니는 아버지의 말에 찬성했다. 아버지는 나에게 작은 전원주택을 지어줄테니 외할머니가 사시는 앙성에 가서 당분간 혼자 살아가라고 했다. 아버지 어머니도 언젠가는 거기에 가서 살겠으니 내가 먼저 거기에 가서 살고 있으라고 했다. 앙성 마을은 남한강을 끼고 있어 정신수양에는 좋을 것이라고 했다.

그해 가을, 나는 외할머니가 계시는 충북 앙성으로 갔다. 규모는 작지만 아담한 주택에 마당이 넓은 전원주택이었다. 외할머니가 사시는 집과는 100여 미터 정도 떨어져 있지만 외할머니는 자주 나를 찾아 오셨다. 2년전에 남편을 잃고 혼자 사시는 일흔 셋의 나이지만 아직도 정정하시어 원만한 농촌 일은 혼자 하신다. 마당을 나서면 맑은 물이 흐르는 남한강이 보인다. 그리고 집 뒤에는 빼어난 산과 아름다운 숲이 사람의 시선을 사로 잡는다. 사시사철 흐르는 계곡의 물이며 산속 아담한 사찰에서 들리는 독경소리는 텃세가 심한 옥천에 비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내가 충북 옥천에 가서 살 게 된 것은 그쪽으로 시집을 갔기 때문이다. 남편 최만석 씨는 나보다 한 살 많았고, 나는 41살이었다. 마흔이 넘도록 시집을 가지 못하고 있던 나는 친구의 소개로 최만석 씨를 알게 되었다. 평소에 나를 따라다니며 추근거리는 남자들만 보다가 최만석 씨를 보자 마음에 쏘옥 들었다. 성격이 과묵하고 차분해 보이고 말이 없는 것이 내 마음에 들었다. 비록 시골이긴 하지만 저런 남자라면 일생의 동반자로 살아도 괜찮을 것만 같았다. 서울에서 명문 법대를 나와 사법시험 준비를 한다면서 직업이 없긴 해도 농토가 있다고 하니 먹고 사는데는 큰 불편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 더구나 시부모 될 사람은 남편에게 뚜렷한 직업이 없자 가게를 하나 차려서 우리 부부가 오붓하게 살도록 해 준다고 하였다. 마흔이 넘은 나이에 이보다 더 좋은 남자를 찾다가는 영영 혼기를 놓치게 될 것이라는 부모님의 조급함에 내 마음이 그렇게 기울어져 결혼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막상 최만석 씨와 결혼을 해 보니 아차! 속았구나 싶었다. 하지만 이미 엎어진 물그릇이다. 시부모님이 가게를 내주겠다면서 가게를 알아보려 다니는 것은 시골에서 가장 작은 코딱지 만한 구멍가게였는데 그것도 얻는다는 시늉만 하고 다녔다. 진실로 얻을 마음은 없었던 것이다. 아들의 사법시험합격에 큰 기대를 걸고 있으니 사법시험에 합격하면 굳이 시골 촌구석에서 가게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때까지 내 마음을 다독거려 놓기 위해 가게를 얻는다는 시늉을 하는 것이었다.

혹여 내가 남편의 직업이 없어 혼인을 하지 않을까 해서였다. 직업이 없다보니 남편은 하루 종일 컴퓨터에 앉아 게임만 하고 있었다. 사법고시에 3번이나 낙방하고 보니 이제는 더 이상 사법시험에도 흥미를 잃은 듯 보였다. 농토라도 제법 있는 줄 알았는데 막상 결혼을 해보니 그것도 아니었다. 그제야 하는 잘못 결혼했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나는 임신이 되었고, 남편의 구박은 갈수록 미친사람처럼 극심해져 가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런 고통을 가슴 속에 혼자 묻어 놓고 삭이며 참고 살았다. 만약 이 일이 친정 부모님이 아시면 병이 나서 들어 눕기라고 하지 않을까 싶어서 혼자 참고 살았다.

남편이 직업이 없으니 하루종일 게임을 하느라 컴퓨터에 앉아 있다 보니 나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래서 매일 컴퓨터에만 앉아 있지 말고 무슨 일이라도 직업을 찾아보라고 하였다. 정말 명문대학 법대를 나온 사람이 이런가 싶었다. 이 일로 남편과 나는 말다툼이 잦았다. 시누이도 남편과 합세하여 나를 구박하기 시작했다. 그것도 모자라 시어머니까지 남편의 편을 들며 나를 심하게 구박하기 시작했다. 그런 생활을 3년동안 참고 살았다. 사람이 참는다는 것도 한계가 있지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차라리 나하나 없어지는 것이 편할 것 같아 죽을려고 버스를 타고 서산 바다가로 향했다. 파도가 밀려 왔다가 밀려가는 모습을 보면서 인간의 삶이란 결국 저 파도처럼 어느 날 이 세상에 왔다가 어느 날 한 순간의 포말처럼 사라지는 것이구나 생각하니 인간이란 존재가 무척 초라하게 보였다.

깊은 바다 속으로 한 발 두 발 들여 놓는 순간 이건 아니구나 싶었다. 바다 깊숙이 몸을 들여 놓던 나는 반사적으로 바닷가 모래밭으로 급히 뛰어 나왔다. 그리고 주저 앉아 울었다. 한참 울다가 얼굴을 들고 보니 저녁노을이 수평선으로 조용히 몸을 감추고 있었다.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온 나는 남편에게 심하게 구타를 당했다. 어디 갔다가 오느냐면서 주먹으로 내 얼굴을 마구 내리치기 시작했다. 너무나 아프고 고통스러워 반항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 않아 울기만 했다. 그 일로 나는 얼굴의 턱뼈가 변형이 되어 둥글 넓적한 형체의 모양이 되어 버렸다. 처음 내 얼굴은 약간 길고 갸름한 예쁜 얼굴이었다. 그 길로 나는 3년만에 짐을 챙겨 집을 나왔다. 더 이상 남편과 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낳은 아들도 넘겨 주고 위자로 한 푼 받지 않고 몸만 빠져 나왔다.

당장 갈 곳이 없어 인근 사찰에 가서 스님에게 부탁을 하고 짐을 거기에 맡겨 놓았다. 내가 가지고 온 짐은 꽤 많았다. 나는 노래를 하고 무용을 하기 때문에 무대 의상이 많았다. 대학에서는 고전무용을 전공했고, 사회에 나와서도 무슨 행사가 있으면 가수나 무용수로 출연에 나서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노래도 잘 불러 노래자랑 대회에 나가면 늘 1등을 해서 우승컵을 들어 올리곤 했다. 그러면서 나는 가수 활동도 했다. 군이나 면에서 축제행사가 있으면 나가서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었다. 2010년 강원도 원주시에서 노랫말 가사공모에서 ‘태백산’으로 대상을 차지하면서 나는 작사가로 데뷔를 하였다. 충주가 고향인 나는 충주대학에서 무용학과를 나왔다. 갸름한 계란형 얼굴에 예쁘게 생겨 대학에서는 늘 남학생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대학을 나와서도 내 뒤를 따라다니는 남자들이 한 두 명은 있었다. 그런데 최만석 씨라는 남자와 결혼하면서 나는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시골에서 직업도 없는 남자. 학력은 서울의 명문 법대를 나왔지만 사법시험에 번번히 낙방만 하다보니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직업없이 놀다보니 법대 나온 인품과 정서는 어디론가 바람처럼 사라지고 마치 조폭처럼 사납기 짝이 없는 악당이 되었다. 이런 남자와 결혼해서 오늘의 불행을 자초한 내 자신이 너무나 원망스럽기만 하였다. 도둑을 맞을려고 하면 개도 안짖는다는 말이 내 결혼을 두고 한 말이 아닌가 싶었다.

내가 남편에게 구타를 당하는 날 나는 그 자리에 쓰러졌다. 얼굴을 맞아 코피를 쏟으며 쓰러진 내 등 뒤에는 남편의 거친 구둣발이 수 없이 덮쳤고 그로 인해 나는 혼수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이웃 아줌마의 도움으로 내가 병원으로 실려 가긴 했지만 그때부터 나는 사람이 싫어지면서 우울증에 걸린 것이다.

“예진아! 여기에 오니까 좋지. 공기가 맑고 조용하고 마을 인심도 좋고..”

“예, 여기가 참 좋아요.”

“이젠 춤추고 노래 부를 생각은 하지 말거라”

“...................”

“그리고 좋은 남자 만나 다시 시집이나 가거라.”

“이제 시집은 가지 않을 거예요.”

“한번 시집을 안 가더니 혼쭐이 난 모양이구나?”

“............”

좋은 자리 있으면 재혼을 하라는 외할머니 말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난날 최씨 남편과 살던 지옥같은 3년을 생각하면 나는 정신이 돌아버릴 것 같았다. 지금도 그 일만 생각하면 소름이 끼쳤다. 나는 그 일로 지금도 정신병에 가까울 만큼 우울증이 매우 심하다. 오늘도 나는 손등에 눈물을 적시며 거울속의 내 얼굴을 물끄럼이 바라보았다. 곱디고운 처녀 때의 예쁜 얼굴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방안에 갇힌 한 마리의 새가 되었다. 방문은 꼭꼭 잠겼고 혹시 내가 탈출하여 무슨 일이라도 저지를까봐 창문은 굳게 차단됐다. 방안을 서성거리던 나는 창밖을 물끄럼이 바라보았다. 마당 한 구석에 혼자 외롭게 서 있는 대추나무는 잎이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만 을씨년스럽게 보였다. 왜 내가 여기에 갇혀 있을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해 보기도 했지만 내가 왜 여기에 갇혀 있어야 하는가를 안다면 나는 지금 여기에 갇혀 있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를 여기에 가두어 놓은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 나의 남편이었던 최씨라는 남자였다. 직업도 없고 학력도 없고 조폭같은 음흉한 발톱을 숨기고 나를 이렇게 상처투성이로 만들어 여기에 가두어 놓은 것이었다. 나는 남편 최만석 씨와 살던 때를 생각하면 악몽처럼 소름이 끼쳤다. 최만석 씨 는 성격이 포악하기 짝이 없었다. 마치 의처증에 걸린 듯 하였다. 나는 수시로 무대공연 행사장에 나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춰야했다. 거기에서 나는 인생의 즐거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그는 혹시 내가 이러다가 다른 남자와 눈이라도 맞아 좋아 지내지 않을까 하는 의심도 하게 되었을 것이고, 그것이 한계를 넘어 의처증과 같은 증상으로 비화되어 나에 대한 폭력은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해졌던 것이다.

물론 거기에는 사법시험에 여러번 낙방하자 사회에 대한 저항감도 작용 했을 것이다. 게다가 그 외동아들로써 부모가 오냐오냐 하고 키우면서 바람둥이기도 하였다. 내 친구 중에 인물이 반반한 여자가 있으면 꼬셔 수시로 섹스를 하기도 하였다. 그러다 보니 그에게는 늘 여자로 인한 추문이 떠나지 않고 있었다. 3년동안 살면서 나에게 주먹으로 폭력을 행사하던 그는 어느새 발길질까지 하면 대원군 같은 폭군이 되어 버렸고, 결국 갸름한 예쁜 내 얼굴은 주먹으로 둥글넙적하게 못생긴 늙은 호박처럼 만들어 놓은 것이다. 나는 그것이 지금도 억울했다. 다시 옛날의 얼굴로 되돌려 놓기엔 너무 먼 길을 왔다. 주먹으로 뒤틀어진 턱뼈가 너무 굳어 수술하자면 엄청난 비용이 든다는 것이 성형외과 의사 선생님의 말이었다.

그날도 나는 마당에서 남편 최만석 씨에게 모질게 주먹으로 폭행을 당해 얼굴에 시퍼렇게 피멍이 든 채 졸도하여 쓰러지자 남편은 꾀병을 한다면서 찬물을 한 통 들고 와 내 머리위에다 쏟아 부었다. 살을 도려내는 듯한 겨울의 강추위에 나는 정신과 육체가 모두 꽁꽁 얼어 붙었다. 내가 눈을 뜨고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이미 나는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옆집에 사는 아줌마의 도움으로 소생은 했지만 나는 이미 정신이상자였다. 그러나 동생의 눈물겹도록 극진한 보살핌으로 나의 잃어버린 정신은 가랑비처럼 오락가락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겨우 제 자리로 돌아 온 것이다.

나는 창문 틈으로 비집고 들어 온 아침 햇살에 몸을 일으켰다. 오늘도 창문은 굳게 닫혀 있다. 산다는 것이 왜 이렇게 공허할까? 나는 하루에도 이런 생각을 수 없이 해보곤 했다. 삶이 공허하다는 것은 내가 처한 환경의 탓만은 아니겠지만 도무지 알 수 없는 나의 존재가 새삼 의지(정열)의 결단에 의해 성취되지 못하고 우물쩍 자기중심성을 상실한 채, 내가 나를 용서하는 후덕한 인품의 소유자가 되지 못한 채, 인간소외를 극복하지 못하고 어디론가 표류해 가고 있는 것은 왠 일일까? 나는 지금까지 잘 산다는 것은 화가가 그림을 잘 그리듯, 육상선수가 달리기를 잘 하듯이 삶을 잘 풀어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풀어나가야 할 삶의 방식은 동물이나 다른 존재자들이 그들의 생명을 단순하게 이어가는 방식과는 다른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랬던 내가 오늘 이 시간만은 인간의 덕(德)이 정욕이나 태만이나 방심 따위에 의해서 가리워짐이 없이 가능성에서 현실성으로 옮겨지는 것이라고 주장한 ‘소크라테스’의 행복론에 마음이 자꾸만 침잠(沈潛)되고 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이것은 내가 영혼의 세계, 진리의 세계 즉 이데아의 세계에 대한 정열적인 사랑(eros)을 필요로 하는데도 내가 사랑을 상실했기 때문인지 모를 일이었다. 나는 무엇 때문에 사는가? 나는 자꾸만 여기에 마음이 몰두해 갔다. 삶에 대한 진지성을 나는 포기하고 싶었다. 더구나 내가 지금까지 쏟아부은 가수가 되겠다는 노력의 댓가가 헛되게 돌아갔다는 절망감에서 한 치도 벗어날 수가 없었다. 내 스스로 나를 형성해 가며 다듬어 가는 자성(自省) 즉 적극적인 사고방식이 나에게는 없어진 것이다. 내가 이 땅에 태어난 보람을 헛되이 자학하면서 나는 나를 놓친 것이다.

나의 삶이 나만을 위한 삶이 아님을 알지만 나는 나의 삶이 나만을 위한 삶이 아님을 인식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의식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내일을 믿으며 오늘을 사는 나이기를 나는 노력해야 하겠지만 오늘 속에 미리 들어온 내일은 나에게 없는 것이다. 오늘의 현실이 이렇게 된 이상 내일의 환상은 그리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 나를 새처럼 이 장안에 가두어 놓고 무척이나 마음 편하게 살 것이다. 하지만 나를 가두어 둔 이상 그 사람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일 뿐 그 의미가 조그만치도 달라질 수는 없었다.

그리고 내가 지향하는 미래라는 것은 이 방 밖에 있다. 그것이 나와 상관이 있을 때 나는 이 속박에서 해방될 것이다. 물론 그것은 기약이 없는 일이다. 그저 나를 기다림 없이 지나가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갇혀 있으면서 그것들을 바라보면서 조금은 기대를 걸어 본다. 기대를 걸어 본다는 것은 희망이 있는 일이다. 나는 나를 이렇게 만든 사람의 균등한 자유와 권리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자유와 권리는 투쟁으로 쟁취하는 것이다. 투쟁없이 쟁취하는 자유와 권리는 속박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그것이 나의 전부다. 나의 육신은 속박되어 있지만 영혼은 자유롭다. 의지를 구사할 수 있는 영혼을 가두는 절대적 방법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나는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아니 나를 해친 사람의 균등한 자유와 권리를 기다리지 않을 수 없다. 나의 현재라는 것은 내가 속박되어 있다는 것을 자유롭게, 느긋하게 그리고 누가 어느 무엇이 나의 삶을 이토록 속박으로 몰아 넣었던가를 연구하는 일 뿐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나는 남편이었던 최만석 씨에게 질문을 던질 것이다. 누가 나의 자유로운 육신을 속박으로 몰아 갔는가를... 그것 때문에 나는 자유와 권리를 보장 받고자 기다리면서 지금 방안에 갇혀 미소 짓고 사는 것이다. 언젠가는 나의 분노가 풀리기를 기다리면서 말이다. 나는 삐거덕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 눈을 떴다. 벽에 기대어 살풋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언니!”

“진희야...”

“언니가 이제 나를 알아 보네.”

어느새 진희의 두 눈은 물기에 함박 젖어 있었다. 가느다랗게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진희는 나의 유일한 동생이다. 진희는 같은 여자로서 누구보다도 나를 이해하고 있다.

“몇 달 동안 나를 알아보지 못하더니 이제야 나를 알아보는 것을 보니 제 정신이 돌아 와 왔나봐. 언니! 물에 빠져도 정신을 차리면 산다고 했어요. 이제 정신이 돌아 왔네요.. 흐흐흑..”

“내 정신이 어째서?”

“언니.”

와락 나를 껴안은 진희의 두 팔에 안겨 비몽사몽(非夢似夢)간에도 나는 꺼이꺼이 울었다.

“언니 남편이었던 최만석 이란 남자 말이야. 그 남자가 언니 친구인 여자와 붙어 살다가 친구에게 사기를 쳐서 경찰에 잡혀갔다고 해요. 언니를 이렇게 만든 그 최만석이란 못된 남자 말이예요”

유독 최만석이란 말에 악센트 들어가는 이유를 나는 알고 있다. 진희도 최만석이란 그 남자 때문에 어지간히 화가 난 모양이다.

“언니 친구와 동거하면서 둘이 공모하여 사기를 쳐 고소당하자 도망쳤는데 사기혐의로 경찰에 수배를 받아오다가 오늘 아침에 경기도 포천에서 체포됐다고 하네요. 아침 TV 뉴스에 나왔어요.”

“그래에....”

나는 또 하나의 여자가 나처럼 맹수의 먹잇감이 되어 희생을 당했다고 생각하자 가슴에 분노의 피가 끓어 올랐다. 내 친구란 여자가 최만석 씨를 꼬셨는지 최만석 씨가 내 친구란 여자를 꼬셨는지는 모르지만 인간 아닌 또 다른 인간의 모습을 본 것 같았다. 자기의 아내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것도 모자라 이젠 친구의 재산을 갈취하다니.. 결국 인간 아닌 그 최만석 씨라는 남자는 이런 식으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씁쓰레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명문대학 법대를 나온 간판이 아깝다고 생각했다.

내가 바다에 뛰어들어 죽을려고 했던 것이나 그가 사기를 쳐야 할 만큼 각박했던 상황을 놓고 보면 나와 그는 어딘가 닯았다는 생각이었다. 나는 진희의 손을 잡고 방을 나섰다. 마당에 나오니 따뜻한 가을 햇살이 내 가슴에 안겨들었다. 나는 마당에 서 있는 대추나무를 바라보았다.

잎을 떨군 앙상한 나무가지에서 까치가 까욱! 카르륵 하면서 울어 댔다. 내가 첫 결혼에 실패해 인생을 망쳤다고 생각하자 씁쓰레한 마음 금 할 수가 없었다. 더 이상 결혼은 하기 싫어졌다. 재혼 따위는 입에 올리기도 싫었다. 마당을 나서면서 진희는 내 귀에 대고 이렇게 말했다.

“오늘 그 사람 우리 집에 왔어요..”

그 사람이란 내가 최만석 씨와 결혼하기 전에 나에게 청혼을 한 남자 주영호 씨였다. 충주에서 괜찮은 화사에 근무하는 과장이었다. 진희의 말로는 주영호 씨는 지금도 나를 잊지 못하고 50살이 되어도 독신으로 혼자 산다고 하였다. 그렇다 해도 내가 결혼해서 아이까지 낳고 살던 여자라고 해도 나와 결혼을 할려고 할까? 그런 생각이 내 머리에 뱅글뱅글 떠 올랐다. 주영호 씨가 나에게 청혼을 한 것은 내가 처녀일 때였지 결혼해서 아이까지 낳고 이혼녀라는 딱지가 붙은 줄 알면 주영호 씨는 나와 결혼을 할려고 하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런 내 생각을 읽지 못한 진희는 그 남자와 결혼을 하는 것이 어떠냐고 나에게 말했다. 하지만 내가 결혼을 한다고 해도 주영호 씨는 내가 이혼한 여자라는 사실을 알면 할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주영호 씨가 나에게 청혼을 한 것은 내가 처녀로 있을 때이기 때문이다. 그런 나의 생각이 맞던지 안맞던지 이미 주영호씨는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버린 상태였다. 나는 만일 내가 처음 최만석 씨와 결혼하지 말고 주영호 씨와 결혼을 했으면 어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그러다가 나는 문득 내가 사랑을 주제로 한 노래 가사에 공모하기 전 어느 일간 신문에서 본 ‘오늘의 운세’를 본 적이 있었다. 거기에 보니까 내가 나이에 해당되는 운이 이렇게 적혀 있었다.

- 북쪽에서 기쁜 소식이 올 것이며 횡재수나 돈이 들어 올 것이다 -

강원도가 실시한 노래가사 공모에 응모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이 신문을 보고 응모를 했다. 그리고 응모한 후 2달 여 만에 당선 통보를 받았다. 당선된 작품은 다음과 같은 <그래도 산다는 것은>이다.

 

이 세상에 하늘은 넓고 땅은 넓어도

내 몸 하나 머물 곳은 어디에도 없네

예쁜꽃 한송이 피고 싶어 태어났지만

어느 뒷골목 길에서 바람처럼 다니며

그래도 산다는 것은 즐거운 것이지.

 

이 세상에 사람은 많고 남자는 많아도

내 몸 하나 의지 할곳 어디에도 없네

어느 냇가에 버리진 조약돌로 다니며

그래도 산다는 것은 행복한 것이지.

 

신통하게 예언하는 ‘오늘의 운세’를 신문에 쓴 분은 권성해 씨란 분이었는데 경남 양산에서 명리학연구소를 경영하고 있었다. 나는 그 때 그 신문을 꺼내어 보았다. 혹여 전화번호를 알 수 있을까 해서다.

마침 전화번호가 기록돼 있었다. 나는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내 사주를 한 번 봐 달라고 하면서 출생 년월일시를 알려 주었다. 다음 날 그분에게 전화가 왔다. 직접 상담을 받으려 오라고 해서 나는 경남 양산으로 그 분을 찾았다. 권성해 선생님은 영상에 입력된 내 사주를 보여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성씨는 김씨이고 남편의 성씨는 최씨인데 성씨 궁합을 보면 이렇게 만난 부부는 가장 문제가 많은 악연으로 만났습니다.”

그러면서 요즘 같은 시대에는 연애결혼이 80% 이상이나 되는 궁합으로 잘못 만난 경우에 해당된다고 하였다. 나의 경우 궁합으로 이혼율이 가장 높은 반면에 생리사별의 고독한 운명을 만난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조선왕조가 왜 망했는지 아느냐고 하면서 그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민씨가 왕후로 들어 앉아 조정이 편안하기 보다는 정변까지 일어나야 했다. 명성왕후 민씨는 조선조의 종말을 고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시아버지였던 대원군까지 중국 땅에 끌려 가도록 한 비극이 벌어지게 하였다고 했다. 고종 황제의 독살은 말할 것도 없고 왕후 민씨 자신은 일본인들에게 시해를 당함으로써 조선의 종말을 맞이하게 된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세조를 왕위까지 한 일등공신 한명희는 성씨 궁합으로 보면 세조와 좋은 인인이었기 때문에 일개 경덕궁 문지기에서 일약 영의정을 3번이나 하면서 3대에 걸쳐 임금을 모시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임사홍 역시 4번의 좋은 인연이었기에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임금의 총애를 받게 되어 오래도록 관직에 머물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조광조와 같은 사람은 성씨 궁합으로 보면 최씨와 김씨가 만난 것처럼 좋지 않아 같은 젊은 나이에 죽음을 맞게 되었다는 사실이 어찌 우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고 하였다. 또한 장희빈과 장녹수 같은 사람 역시 성씨 궁합으로 보면 임금에게 총애를 받았지만 그 임금의 손에 모두 죽음을 당하고 말았으니 그 원인도 성씨 궁합이 나빠서 일어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그것이 바로 오행의 원리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겠지만 심령학적으로 말한다면 상극의 작용은 전생에서부터 맺어진 원한을 갚기 위해 같은 시대에 함께 태어난 인연처럼 희한하게 만나 죽기 살기로 친해지거나 가까워지게 되고 어떤 원인을 만들게 되어 죽고 죽이는 복수가 이 세상에서 이뤄지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고 하면서

“그래서 김가의 원수는 최가에게 최가의 원수는 김가에게 갚게 되는 인과응보의 원인을 원한으로 갚게 된 셈이 아니겠어요. 최씨 남자와 김씨 여자와의 악연도 이런 맥락에서 봐야 할 것입니다”

하는 권성해 선생님의 말에 나는

“선생님 애기를 듣고 보니까 세상이 겁이 나는군요”

하고는 김가 성에는 어떤 성씨를 만내야 좋겠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권성해 선생님은 김씨 성에는 박씨나 이씨 성이 좋으며 오행이 같은 권씨나 김씨 성도 인연이라고 했다. 결혼을 해도 무난하고 직장의 상사관계, 부하관계 사업상의 거래 관계 등 여러 가지 방면으로 다 조화가 이뤄지게 된다고 하였다.

나는 주(주영호)씨는 어떠냐고 물었다. 그러자 권성해 선생님은 주씨도 최씨처럼 상극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최씨와 주씨와의 결혼은 파국을 맞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풀이한 내 사주를 영상에서 보라고 하였다. 내가 영상에 뜬 사주를 보니 이렇게 되어 있었다.

 

년 월 일 시

乙 戊 壬 庚

巳 寅 子 戌

상관 편관 * 편인

편재 식신 겁재 편관

木 土 水 金

火 木 水 土

편관 편관 * 편관

편인 편재 - 정재

편재 식신 겁재 편관

 

권성해 선생님은 영상에 나타난 내 사주를 가리키며 여자는 정관이 남편이고 편관이 외간남자인데 정관이 없고 편관이 많은 사주는 운명적으로 첫 결혼에 성공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말하자면 사주에 편관이 많아서 남편과 이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여자가 첫 결혼에 성공 할려면 사주에 정관이 하나 정도 있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특히 관살이 순수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저는 앞으로 결혼해도 또 다시 실패 하겠네요?”

하고 내가 묻자 권성해 선생님은 그렇긴 하지만 어떤 남자와 결혼하느냐에 따라서 성공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다고 하면서 오늘날 최첨단 과학이 발달한 시대에서도 태풍이나 허리케인을 없을 방법은 없다고 하였다. 그러기에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도 각자 타고난 운명속에 담겨진 크고 작은 재앙을 제거하는 방법은 없지만 미리 태풍이나 허리케인의 진로를 알고 대피를 하던지 최대한의 준비를 갖춘다면 피해를 당하지 않거나 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인간도 자신에게 막칠 운명적 재앙을 미리 알면 피할 수 있지만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 속성이 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운명에 대해서는 믿을려도 하지 않으며 그저 당하고 나면 운명이거니 하면서 자위를 한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여자가 남자와 결혼을 해서 파경을 맞았다면 그 파경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그 남자와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지만 결국 결혼을 해서 당한다고 하였다. 이런 것을 두고 흔히 운명이니 팔자니 하지만 그 속을 자세히 들어도 보면 자신의 실수로 인한 재앙임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또한 안전한 길이 있는데도 그 길을 몰라서 험준한 산길을 택해서 호랑이를 만나 재앙을 당하는 이치와 같다고 보면 된다고 하면서 순간의 실수는 소중한 자신의 재산을 빼앗고, 영혼을 함몰 시키고, 인생 전부를 망가트려 놓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는 직업. 학력. 가문. 인품. 기질 등을 꼼꼼히 따져보지 않고 단순히 외모만을 판단해서 성급하게 결혼했다가 평생 한을 안고 살아야 하는 여자가 적지 않다고 하면서 ‘순간의 선택이 백년을 좌우한다’는 어느 전자회사의 제품 선전 문구를 보지 못한 모양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어떤 여자라도 이런 남자와 결혼하면 파경을 맞는다고 하면서 어느 한 남자 사주를 한번 보여 주겠다고 하면서 영상을 보여주었다.

 

남자 최영철 1983년 계해년 31살 돼지띠 학력 : 박사

 

년주 월주 일주 시주

계해 기미 병진 기축

정관.편관 상관.상관 ㅇ상관 상관.상관

 

“박사라면 여자들은 우선 호감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결혼은 호감이나 동정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남자는 병화로 태어났으나 화(불)를 도와주는 동기가 없습니다. 남자는 정편재가 여자인데 정편재가 되는 경신금(庚辛金)이 없습니다. 장간 역시 삼합이 되어 소멸되었습니다”

권성해 선생님은 그렇게 말하면서 정편재는 육친으로 보면 부인이지만 한편으로는 재산이기도 한다고 하였다. 일간 병화가 6월에 태어나 사주가 허약하니 신약사주인데 진상관격이라 인수운을 만나면 대길하지만 상관운을 만나면 패망한다고 하였습니다. 상관(傷官)이란 관(官)을 상하게 하는 흉신(凶神)이라 이런 사람은 공직에 진출하기가 어렵다고 하였다. 나는 이혼한 남편 최만석 씨의 사주를 봐 달라고 하자 권성해 선생님은 풀이한 사주를 영상에 올렸습니다.

 

남자 최만석 1969년 己酉년 45살 닭띠

 

년주 월주 일주 시주

己酉 己巳 己酉 甲戌

비견.식신 비견.인수 ㅇ식신 정관.겁재

 

권성해 선생님는 영상에 든 사주를 보며 이렇게 설명했다.

“이 분 역시 여자인 정편재가 없습니다. 4월에 태어나 토금(土金)이 강왕하여 신강사주이긴 하지만 더운 절기에 태어나 물(水)이 있어야 하는데 물이 없어 매우 건조합니다. 따라서 남에 대한 배려보다 아집이 강해 보입니다. 재산을 모으자면 재왕(財旺)하거나 식신생재 해야 하는데 재왕이 불발입니다. 사주 어디에도 정편재가 없으니 부인을 유지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나서 권성해 선생님은 그렇다면 이런 남자에게 걸려들어 결혼하게 되는 여자는 어떤 사주명운을 가진 여자인지를 알려 주었다. 그것은 첫째 사주에 관살이 없는 여자이거나 둘째 관살이 있어도 태과한 여자이거나 셋째 정편관이 전연 없는 여자이거나 넷째 정편관이 있어도 너무 많아 혼잡하거나 정편재도 없고 사주가 탁한 여자이거나 다섯째 사주에 양인살(羊刃殺)이 있거나 원진살이 강한 여자인데 이런 여자는 99% 남자를 잘못 만나 파경을 맞는다고 하였다. 양인살이란 양(羊)을 잡는 칼(刃)이란 뜻으로 무서운 흉살이라고 하면서 이런 여자는 재혼이나 삼혼을 해도 실패할 확률이 매우 높은데 이름은 말할 수 없지만 가수나 배우 중에는 재혼 삼혼을 해도 실패한 분이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런 남자와 결혼하게 되는 여자들은 대부분 40살을 넘어 혼기를 놓친 여자이거나 남자의 외모만 달랑 보고 조급함으로 사주명운은 물론 학력. 성품. 가문. 기질. 직업. 재산. 등은 보지 않고 속된 말로 똥걸레 치우듯이 얼른 서둘러 결혼을 한다는 것입니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불행을 막을 수 있는데도 순간의 판단으로 평생동안 가슴에 한을 묻고 사는 여자가 우리 사회에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OECD 국가중에서 이혼율이 가장 높습니다”

권성해 선생님은 그렇게 말하고 나서 결혼도 그렇지만 인간의 삶에는 예행연습(Rehearsl)이 없다고 하였다. 내가 집으로 돌아간 후 늘 권성해 선생님이 머리에 떠 올랐다. 더구나 70나이에 건강한 몸으로 열심히 혼자 사시는 권성해 선생님이 아버지처럼 존경스럽기도 하였다. 내 나이 41살이니 꼭 아버지 뻘이었다. 내가 경남 양산에 갔을 때 권성해 선생님이 나에게 하신 말씀이 생각났다. 그 때 권성해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계수(癸水)로 태어났어요. 즉 물로 태어났는데 수(水)로 태어난 사람은 금(金)으로 태어난 사람과 만나야 금생수(金生水) 하여 궁합이 좋습니다. 다만 신금(辛金)을 만나야 하고 경금(庚金)은 같은 철강석이라 수(水)을 만나면 녹이 쓸기 때문에 좋지 않고 반드시 신금(辛金)을 만나야 합니다. 그 이유는 신금은 금반지나 보석처럼 가공이 된 쇠이기 때문에 녹이 쓸지 않고 매우 아름다워 경금(庚金)인 철강석이 비교할 바가 아니지요.”

그렇게 말하면서 권성해 선생님 자신은 경진년(庚辰年) 12월 신금(辛金)일에 태어났다고 하였다. 그래서 천생연문인 배필을 만날려면 수(水)로 태어난 여자와 만나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여자를 만나야 일찍이 부인과 헤어졌다고 하였다. 내가 권성해 선생님을 만나고 온 후 권성해 선생님은 나에게 전화를 걸어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어도 비관하지 말고 열심히 살아가라고 하였다. 가끔 죽고 싶은 생각이 날 때도 있지만 권성해 선생님의 말씀이 생각나면 죽어야 한다고 생각을 접곤 하였다.나와 권성해 선생님은 무려 2년동안이나 서로 전화를 주고 받으면서 나는 혼자 사시는 권선생님을, 권선생님 역시 혼자 사는 나를 영혼으로 위로해 주었다. 그렇게 서로를 위로 하는 동안 나와 권성해 선생님은 육신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나는 권성해 선생님을 아버지처럼 존경하고 권성해 선생님은 나를 딸처럼 귀여워 해 주었다.

그러던 어느날 내가 사는 마을이 재개발 공사가 착수되면서 어렵게 달세로 살던 집을 내줘야 할 처지에 놓였다. 이 일은 5년전부터 추진해 오던 일이였는데 지금에 와서는 집을 철거해야 하게 되었다. 집 주인은 보상비를 받지만 나는 달세로 살고 있는 터이라 보상도 없이 그대로 집을 옮겨야 할 입장이었다. 돈은 없고 어디로 이사를 해야 할 지 난감했다. 더구나 나는 가수와 무용수 활동해야 하기 때문에 무대의상이 많았다. 그래서 의상실과 기거하는 방 2개는 반드시 있어야 했다.

하루 하루 집을 철거하는 날이 다가오자 오갈데가 없는 나는 다급한 마음에 권성해 선생님에게 전화로 나의 어려움을 털어 놓았다

“선생님. 제가 달세로 사는 집이 철거를 당하게 되었어요. 5년전부터 재개발지역이 되어 있었는데 이젠 집을 철거해야 하는가 봐요. 집을 얻어야 하는데 방 얻을 돈은 없고 난감하네요. 더구나 무대의상이 많아 방은 2개 짜리 집을 얻어야 하는데요. 어찌 하면 좋을지 모르겠어요.”

그런 내 말에 권성해 선생님은 설마 길바닥에 나와 앉기야 하겠느냐고 하면서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하면서 별로 다급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무척 급한데 권성해 선생님은 느긋하게 여유있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나로서는 조금은 섭섭했다. 나는 빨리 집을 비우라는 독촉에 다급하여 며칠 후 또 다시 권성해 선생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권성해 선생님은 역시 태연스럽게 말했다.

“잘 생각해 보시고 정말 갈 때가 없으면 당분간 우리 집에 와서 계세요”

나는 다급한데 적극적으로 나서주지 않는 것이 섭섭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갈 곳이 없으면 오라고 하니 조금전의 섭섭한 마음은 지워졌다. 그로부터 며칠후 나는 무조건 권성해 선생님에 의지할려고 아삿짐을 싸서 차에 싣고 경남 양산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날 나는 넓은 정원에 방이 넓은 2개에 방이 8개나 되는 3층 단독주택에 사시는 권성해 선생님 집에 들어 갔다. 그렇게 해서 나와 권성해 선생님은 누가 먼저 사랑을 고백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자연스럽게 부부로 결합 되었습니다. 그때 권성해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 젊은 부인을 얻은 것도 내 팔자요 마흔 하나인 젊은 과부가 일흔이 넘은 남편을 얻은 것도 다 팔자가 아니겠오”

하면서 나를 보듬어 안아 주었다. 내가 평생에 하고 싶은던 가수활동을 적극적으로 도와준다고 하시면서 「김예진 리사이틀」을 준비해 주겠다는 권성해 선생님의 말을 듣자 감격의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부부로 만난 후 나와 권성해 선생님은 모처럼 낙동강이 바라보이는 근린공원을 산책하였다. 맑은 가을하늘 아래엔 흐드러지게 핀 코스모스가 바람에 흔들리며 고개짓 하는 모습이 마치 우리들의 행복을 축하해 주는 것처럼 보였다. 나도 이렇게 행복하게 살 수 있는 팔자가 있었구나 하고 생각하자 가슴이 뭉클했다. 권성해 선생님 이렇게 말했다.

“세상 사람들은 불행을 당하면 그것이 삶의 끝인가 생각하지만 불행은 가파른 고갯길을 올라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면서 잘 견디어 내면 평탄한 길을 만나게 되지요.”

그러면서 우리가 이렇게 만난 것도 팔자(八字)라고 하였다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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