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일은 본래
옳고 그름만으로 재단되지 않는다.
말 하나에도 때가 있고,
행동 하나에도 자리가 있으며,
같은 표현이라도 어느 시대, 어느 상처 위에 놓이느냐에 따라
그 무게는 전혀 달라진다.
스타벅스의 ‘탱크’라는 이름 또한 그러하다.
본래 오래 사용되어 온 상품명이라 하니
그 자체를 곧장 악의로 단정할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세월의 상처가 아직 채 아물지 않은 시기에
오해와 논란을 부를 표현을 내놓았다면 기업 또한 시대의 감수성과
역사적 맥락을 더욱 깊이 헤아렸어야 함은 분명하다.
허나 더 우려스러운 것은
그 이후의 풍경이다.
기업의 실수 하나가 순식간에
진영의 깃발로 변하고,
좌와 우가 분노를 증폭시키며
불매와 증오를 경쟁하듯 쏟아내는 모습은 참으로 피로한 시대의 자화상이다.
더욱 경계할 일은 권력자의 말 한마디에
정치와 행정이 일제히 한 방향으로 쏠리는 모습이다.
여당은 권력을 지키는 방패가 되기 전에 국민의 마음을 듣는 귀가 되어야 하며,
행정부는 눈치의 칼춤이 아니라 공정의 저울을 드는 손이어야 한다.
사법 또한 시대의 바람과 권세의 그림자에 흔들린다면
국민은 법보다 힘을 먼저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권력은 영원하지 않다.
그러나 권력 앞에서 굽어진 정의의 모습은
오래도록 역사에 남는다.
또한 기업의 실수에 대한 시민의 비판과 소비자의 선택은 존중되어야 하나,
국가 권력이 특정 기업에 대한 불매를 직접 거론하거나
사실상 압박으로 비칠 언행을 하는 일에는 더욱 신중함이 필요하다.
국가는 분노를 확대하는 확성기가 아니라
자유와 질서를 지키는 마지막 울타리이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는
중도를 말씀하셨다.
지나친 억측은 또 다른 폭력이 되고,
가벼운 무감각 또한 타인의 상처를 덧나게 한다.
그러므로 이번 일은
누가 절대적으로 옳고 그른가를 겨루는 싸움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얼마나 쉽게 분노와 편 가르기에 휩쓸리는가를
돌아보게 하는 거울에 가깝다.
기업은 신중함을 배우고,
정치는 국민의 상처를 정쟁의 연료로 삼지 말며,
국민 또한 함성보다 사실을 먼저 살필 줄 아는
성숙한 시민의식을 가져야 할 것이다.
탱크보다 더 두려운 것은
쇳덩이 전차가 아니라
분노로 굳어진 사람의 마음이다.
한 잔의 커피는 사람을 쉬게도 하지만,
들끓는 증오 위에 놓이면
그 작은 잔 하나조차 전쟁의 깃발이 된다.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누군가를 더 미워할 이유가 아니라,
서로의 상처를 덜 아프게 하는 지혜와 절제일 것이다.
“분노의 불은 끄고, 지혜의 등불을 밝히자.”
“갈등을 키우는 정치보다, 국민을 살리는 정치를.”
“권력에 기대는 나라보다, 양심이 바로 선 나라를~.”
현담 우규보 합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