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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ㆍ예술

권우상 역사 장편소설 = 다라국의 후예들 제1부 제7회

 

 

 

 

권우상(權禹相) 장편 역사소설 제1부 제7회

 

 

                                   다라국의 후예들

 

 

거타지왕은 달마천 장군을 불러 포로로 잡힌 졸마국의 왕자를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느냐고 묻자 달마천 장군은 포로로 잡힌 적장은 졸마국의 왕이 가장 아끼고 귀여워하는 왕자(아들)라고 하면서 곧 졸마국왕이 사신을 보내 올 것이니 그 때까지 살려두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왕자를 참수하겠다고 협박한 뒤에 몸값을 최대한으로 올려 받아내고 돌려보내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했다.

거타지왕은 몸 값은 얼마를 내라고 하면 되겠느냐 묻자 마천우는 몸 값은 우리가 부르는 대로 줄 것이니 왕자를 살리려면 그들은 우리가 요구하는 대로 줄 수밖에 별도리가 없을 것이라고 하면서 사신의 말을 들어 본 후에 결정해도 늦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얼마 뒤에 졸마국으로부터 사신이 왔다. 사신은 거타지왕을 만난 자리에서 졸마국이 탁순국을 침공한 것에 대하여 깊이 사죄한다고 하면서 왕자를 돌려보내 달라고 하자 거타지왕은 졸마국 왕자는 전쟁에서 포로로 잡은 적군의 장수이기 때문에 우리나라를 침공한 침략자를 살려서 돌려 보낼 수는 없다면서 참형에 처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자 사신은 다시는 탁순국을 침략하는 일은 없을 것이니 제발 왕자를 돌려 달라고 애원했지만 적군의 장수를 살려서 돌려 보낼 수는 없다는 거타지왕의 말에 졸마국 사신은 매우 당황한 낯빛으로 왕자를 돌려보내 주신다면 몸값으로 말 5백 필을 주겠다고 하자 거타지왕은

“너희 나라 왕자의 몸값이 겨우 그 정도밖에 되지 않느냐.”

하면서 호통을 치며 거절하자 이번에는 말 1천 필을 주겠다고 제안했지만 거타지왕은 그것도 적으니 그만 돌아가라고 하자 이번에는 말 2천 필을 주겠다고 하자 거타지왕은 그것도 적다고 하자 다시 말 3천 필이면 되겠느냐고 하자 그것도 적으니 말 4천 필을 가져온다면 왕자를 살려서 돌려 보내주겠으니 사신은 그리하겠느냐고

묻자 사신은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렇게 타협하고 졸마국의 왕자 한 사람만 돌려 보냈다. 이러한 소문이 주변국에 퍼져 나가자 고차국(高嵯國 : 고성), 자타국(子他國 : 창녕), 산반하국(散半下國 : 진주) 가라국(加羅國 : 김해), 아라국(牙羅國 : 함안)에서도 사신을 보내와 친교를 맺고 통상을 하게 되자, 탁순국은 단기간에 강국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이듬해 거타지왕은 졸마국으로부터 받은 말 4천필을 기마병으로 무장하여 총 4천명의 기마군을 만들어 단숨에 졸마국을 침공하여 졸마국 왕과 가족들을 참살하고 졸마국 영토를 탁순국에 병합시켰다. 탁순국이 강국으로 부상하자 주변국에서 많은 백성들이 이주해 왔다. 이제 백성들도 늘어나고 탁순국(卓淳國)은 점점 국력이 강해져 갔다. 때를 맞추어 적당히 비가 내려주어 농사도 잘되었고, 백성들은 풍년가를 불렀습니다. 그러면서 언젠가는 다라국에게 빼앗긴 사이기국(斯二岐國) 땅을 되찾아 한다는 생각에 늘 마음이 젖어 있었다.

그런데 정작 거타지왕은 그것 외에도 한가지 근심에 싸여 있었다. 탁순국을 건국하기 전 사이기국에 있을 때 그에게는 아들이 있었는데 첫 아들은 나은지 얼마 되지 않아서 홍역을 앓다가 죽었고, 둘째 아들은 나이 다섯 살쯤 되어 말을 타다가 낙마(落馬)로 죽었다. 어느 날 말이 날뛰는 바람에 떨어져 죽었던 것이다. 그후 거타지왕의 부인 고화(高花)는 몇 년간 임신이 되지 않다가 늦게야 미파공주(美巴公主)를 임신하여 나라가 망하고 피난 중에 출산했다. 그런데 미파공주를 낳은 후 이미 16년이 넘었는데도 왕비는 지금까지 임신이 되지 않았다. 피난 중에 아이를 낳고 산후 몸조리를 잘못한 것이 원인이 된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거타지왕은 장차 왕위를 이어갈 아들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그리하여 거타지왕은 명산대천을 찾아다니며 아들을 점지해 달라고 산신(山神)에게 기도를 하러 다녔고, 왕비에게는 아이를 임신하는데 좋다는 명약은 모두 구해서 먹였다. 그러나 좀처럼 임신이 되지 않자 지금도 거타지왕(巨他之王)은 그 일에 늘 근심에 싸여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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