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7 (수)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권우상(權禹相) 칼럼 = 평민이 황제 자리에 오른 여자

 

 

  칼럼

 

 

                     평민이 황제 자리에 오른 여자

 

 

                                                        권우상

                                              명리학자. 역사소설가

 

 

수 양제(煬帝)는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크게 패하였으나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양저우의 별궁에서 사치스러운 행각을 벌리고 있었다. 지방관리들도 부패하기 짝이 없어 백성들만 곤궁에 빠져 있었다. 내부에서는 고구려 원정의 실패와 엄청난 대토목공사로 인하여 국력이 피폐해져 각지에서 반란군이 일어났으며, 지방 호족들도 독립적인 정부를 세었다. 617년 태원 유수 이연 역시 반란에 가담하였다. 이연이 수나라의 수도인 장안을 했을 때 마침 수양제가 강도에서 우문화급(宇文化及)과 우문지금(宇文智及) 형제에게 암살되자 이연은 국호를 당(唐)으로 하고 스스로 제위에 올랐으며, 건국에 공이 큰 이세민을 진왕(秦王)에 봉했다. 이세민이 반란을 일으켜 수나라 정부군과 싸울 때 목재상으로 많은 돈을 번 무사확(武士彠)은 이세민에게 군자금을 지원해 주었다. 이세민이 왕이 되자 무사확은 유수에 임명되었다. 이때 무사학은 아들이 없어 두 번째 여인과 결혼 했지만 딸만 셋을 낳았다. 셋째 딸 조(粗)은 어릴 때부터 영특하고 얼굴도 예뻤다. 무조(武粗)가 13살 때 이적 장군의 추천으로 궁녀로 입궐하게 되었다. 평민이 궁녀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궁녀로 뽑힌 여자들은 맨 먼저 신체검사를 하는데 처녀가 아니면 왕을 기만한 죄로 참형에 처한다. 무조는 하인들이 돋을 새김질 잎으로 장식된 거대한 수렴 모양의 청동 욕조에 들어가자, 목욕물엔 향내나는 기름과 나무껍질이 띄워져 있었다. 시녀 두 명이 정확하고 숙달된 동작으로 무조를 문지르고 비누칠 하고 헹구고 말려주었다. 젊은 시녀들의 호위를 받으며 문관당의 남자 모자, 끝이 납작하고 휘어진 신발을 신은 한 나이든 여자가 무조의 맥막을 짚어보고 머리카락, 눈, 혀 입냄새를 검사했다. 그녀가 높고 메마른 목소리로 두 서기에게 무조의 얼굴에 난 구멍들의 색깔, 냄새, 형태에 대해 불러 주었다. 그녀는 무고의 옷을 벗게 하고는 손, 팔, 어깨 가슴, 엉덩이, 허벅지, 발목 발가락 크기를 쟀다. “둥금, 각이 짐, 삼각형 뼈가 불거져 있음, 붉은색, 분홍색, 흰색... 그녀는 무조를 눕게 하여다리를 벌리라고 명령했다. 무조는 부끄러웠지만 복종했다. 그녀는 무조의 음부의 폭과 길이를 기록한 다음 얼음처럼 차가운 기구를 뱃속에 넣었다. 그녀가 결론지었다 ‘숫처녀!’ 이런 과정을 거쳐 무조는 궁녀가 되어 정5품 재인(才人)이 되었다. 만 명의 미녀들과의 경쟁에서 왕이란 단 한 남자의 광휘에 흘려 뱀의 군무를 펼치는 내궁, 뻬어난 미모로 평민에 연줄도 금전도 없는 무조는 황제가 되는 치노와의 운명적인 만남을 통해 절대 권력에 도전했다. 그리고 많은 만명의 궁녀들과 수백명의 환관들의 틈새에 끼어 고통과 눈물을 삼키면서 황제와의 하룻밤 통침에 성공했다. 무조는 황후의 몫이 자신에게 가까웠다고 생각했지만 더 이상 황제는 무조를 찾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차기 왕의 자리가 정해진 세자의 마음을 얻는데 성공하면서 고종의 황후가 되었다. 고종은 부왕(태종)의 여자를 아내로 삼자 무황후의 피의 숙청은 시작됐다. 자신의 황후 책립에 반대한 신하 상관의 세력은 날조된 반역죄로 모두 참혹하게 죽고, 가족은 노비로 전락됐다. 이 사건이 일어난 것이 664년이고 고종이 사망한 것이 683년이니 그 후에도 고종은 20년동안 이나 제위에 앉아 있었지만 허수아비였다. 조정의 모든 권력은 무황후가 쥐고 있었다. 중국 6천년 역사 가운데 황제의 자리에 오른 여성은 측천무후 이 사람 뿐이다. 일개 궁녀가 피비린내 풍기는 암투속에 추락과 부상을 거듭하다가 마침내 제왕의 자리에 오른 사례는 극히 드물다. 무황후는 강단과 지락으로 정적들을 무참히 제거하고 심성이 여리고 경박한 황제를 대신해 천하를 경영했다. 그리고 후계자의 권리를 요구하는 아들들을 물리치고 결국 황제의 자리에 올라 제국의 기틀을 닦았다. 하지만 이 무소불위의 권력자, 무정한 어머니의 내면은 그리 간단치가 않다. 잠시 세상에 머무는 하늘과 여자로서 권력의 고삐를 쥐고 천하를 다스리면서도 그녀는 늘 모든 것이 허상, 삶의 일장춘몽이라는 불교, 도교 철학에 심취하고, 절대 권력에 다가서 황제(고종)을 대신해 45년간 국정을 손에 쥔 무황후는 705년 세상을 떠났다. 측천무후란 시호는 사망후 받은 것이다.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