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단편소설 - 대감과 하인

  • 등록 2014.06.11 15:30:58
크게보기

 

 

 

권우상 단편소설

 

 

                   대감(大監)과 하인(下人)

 

 

때는 여름이었다.

이씨왕조개국(李氏王朝開國)의 일등공신(一等功臣)으로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오른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이 하루는 그의 몸종(하인)을 데리고 산천(山川)을 풍류(風流)하던 중 더위를 시킬겸 계곡에서 두 사람이 발가벗은 채 목욕을 하며 이야기를 주고 받고 있었다. 하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나으리, 사람마다 몸뚱이는 하나에 귀달리고 눈달리고 입이 뚫어져 있는 것은 모두 똑 같은데 한 세상사는 꼴은 천충만충이군요! 누구는 남자로 태어나고 누구는 여자로 태어났는가 하면 인색한 부자도 있고 가난뱅이도 있으며 춘정(春情)을 못이겨 냉가슴 앓는 청춘과부도 있고 칼잡이 백정도 있으며 황새코빼기처럼 인중이 길고 자기가 눈 똥 자기가 찍어 먹으면서까지 오래 사는 늙은이도 있고 3살도 못살아 무덤으로 돌아가는 가련한 인생도 있으니 이런것은 다 어디로부터 말미암아 온 것인지 대감나으리께서는 아시옵니까?. 아마도 저 같은 놈은 팔자(八字)가 더러워서 이모양 이꼴로 하인노릇이나 하는가 봅니다”

그러자 정도전은

“네 팔자가 어째서?”

하고 물었다. 하인은

“어째서라니요. 어째서 대감나으리께서는 이몸의 주인 어른으로 태어나셨고 이놈은 정도전 대감의 종놈으로 태어났던 말입니까”

“하하하... 이놈봐라 네놈도 이젠 불두덩이가 탱탱해지더니 신세학(身勢學)이 생각나는 모양이구나”

“쉰네는 신세학이 뭔지 모를 일이옵니다. 어째서 대감 나으리께서는 형부상서영록대부(刑部尙書榮祿大夫)이신 운자경자(云字敬字)의 아드님으로 태어나셨고 이 종놈은 어째서 씨종 홀어미 밖에 안되는 장님의 의붓자식으로 태어났는지를 도대체 모르겠습니다”

“이놈아 네가 어찌 의붓자식으로만 태어났다고 하느냐”

“쉰네 이놈은 앞으로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난다면 꼭 대감나으리의 아들로 태어날랍니다”

“쉰네야!”

“예 대감 나으리”

“너 정말 네가 어데서 왔는지 모르고 있단 말이냐?”

“네. 모르옵니다”

“그렇다면 내가 알려주마! 흔히들 세상만사 돌고 도는 이 세상이라 한다마는 이 말은 세상만사 돌고 돌아 양지(陽地)가 음지(陰地)되고 음지가 양지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사람의 목숨도 돌고 도는 것인데, 네나 내나 이 목숨이 어디로부터 왔는고 하니 음양오행(陰陽五行)의 기(氣)로부터 왔느니라”

“그러면 음양오행의 기(氣)는 어디 있나요?”

“하늘(天)에 있지..”

”그렇다면 하늘이 이 세상 온갖 것들을 만들어 낼 때 대감나으리도 냈고 이 놈도 냈단 말씀인가요?”

“오냐. 그렇단다”

“그래요. 그러면 하늘인지 음양오행인지 그 양반은 아주 못되먹은 사람이네요”

“왜?”

“하늘이면 하늘답게 모든 것을 공평하게 내야지 누구는 만성천자(萬聖天子) 임금도 만들고 누구는 쉰네 같은 종놈도 만들었고, 누구는 굶어 허리가 꼬부라지도록까지 만든 사람도 있고 누구는 원님한테 매맞아 볼기 터지는 놈도 만들었기 때문이죠. 어디 그것만 있나요.....

..........파리나 모기는 잠자리한테 먹히도록 만들었고, 잠자리란 놈은 또 거미줄에 걸려 거미한테 잡아먹히고, 거미란 놈은 또 참세밥이 되고, 참새는 또 매나 독수리한데 물리고 가물치는 날치를 먹고, 날치는 새우를 먹고, 새우란 놈은 또 제새끼가 까놓은 알을 잡아먹으며 살게 만들었으니 도대체 이런 꼴들을 하고 사는게 하늘인지 뭔지가 만들었기 때문이죠....

..... 하여튼 하늘이란 곳엔 심술 보따리만 들어 있고 못된 짓만 골라하는 심보를 갖고 있는 곳인가 봅니다....”

이 말에 정도전은

“우주만물(宇宙萬物)에는 강약대소(强弱大小)가 있고 고저(高低)가 있으며 광(廣)이 있으면 협(狹)이 있고 명(明)이 있으면 암(暗)이 있느니라.........

........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하늘을 말하되 하늘은 바르고 어질며 일만가지를 다 알고 있다고 하면서도 왜 이렇게 세상만사는 천차만별하고 옳고 바른 것을 가려내지 못하느냐 푸념도 해보며, 성미가 급한 사람은 엣다 모르겠다. 나라는 놈은 전생(前生)에서 죄가 있어 그것이 인(因)과 과(果)가 되어 이렇게 이모양 이꼴로 살라는 업보(業報)인가보다 하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게 아니다........

....... 우주만물이나 사람 모두는 음양오행이 뭉치고 흩어지며 움직이는 사이에 만물이 소생(蘇生)한 것 뿐이니라.....”

“그게 무슨 말씀인가요? 제가 알아 듣기에는 좀 어렵네요”

“우주음양(宇宙陰陽)의 기운(氣運)을 말한 것이다”

“대감나으리!

........제가 알기로는 이 세상에서 지은 선악(善惡)은 인(因)이고 저 세상에서 받은 보응(報應)은 과(果)가 되어 나쁜짓과 선을 베푼 인과(因果)에 따라 이승에서 저승으로 저승에서 또 다음 세상으로 돌아가면서 살게 되는데 이 때 사람은 뱀이 됐다, 사람이 됐다, 새가 됐다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음양오행에는 무엇에나 그 기운이 있는 법이다. 그러므로 하늘을 대신하여 너의 애비와 애미가 서로 부둥껴안고 배꼽 위에서 벼락치는 개벽역사운동(開闢役事運動)을 했기 때문에 그 기운에 따라 네가 나왔고, 또 거기에 음양(陰陽)이 있어 남자나 여자가 되었을 따름이니라..........

.......... 다만 그 기운의 맑고 흐린 청탁(淸濁)과 두텁고 얇은 후박(厚薄)에 따라 사람마다의 인품과 인물의 됨됨으로 나뉘어졌을 뿐이니라”

“그러면 우리 아버지의 연장은 말뚝만 하든데 나는 왜 이렇게 작게 만들어 졌나요?”

“연장의 크고 작음도 모두 사주팔자(四柱八字)에 있느니라........

..... 곡식의 씨를 보아도 여름에 뿌려진 것은 왕성하고 겨울에 뿌려진 것은 싹도 나지 않잔드냐....”

“그 사주팔자(사주팔자)라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생겼나요?”

“천지우주(天地宇宙)의 기운이 넘칠 때 바르게만 된 것은 모두 사람이 되어 태어났기에 사람은 누구나 귀(貴)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 다만 그 기운이 편벽되고 약한 것은 천한 물(物)로 나왔을 따름인즉 오직 사람과 짐승이라는 귀하고 천한 등분(等分)은 사주팔자에서 비롯되었을 뿐이지.....“

“그러면 같은 사람이라도 귀하고 천하며 재주 있는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은 어떻게 하여 생기게 되었나요?”

“맑은 기(氣)를 얻은 사람은 지혜로우며 탁한 기(氣)를 얻은 사람은 어리석은 것 뿐이다”

“사주팔자가 사람되어 나왔으니 이것은 천도(天道)에 따라 나왔다는 말이므로 천도(天道)는 하나님의 마음이니 하나님의 마음에 따라 지혜롭고 어리석은 것도 하나님의 마음대로 나뉘어 만들었단 말씀인가요?”

“아니다....

.......천도(天道)는 불편부당한 마음이 없고 오직 만물을 그저 고르게 넓게 펴는 것 뿐이다....(天道無心而善萬物是也) 이 말은 즉 하늘에서 이 사람은 귀하게 만들어야겠다고 고의로 만든것이 아니란 말이다. 이를 무위이화(無爲以化)라 하느니라....”

“도대체 무슨 말씀인지 이놈은 못알아 듣겠습니다. 그놈의 오행(五行)인지 뭔지가 하는 것이 눈도 없고, 코도 없고 귀도 입도 없으면서 거기에다 머리도 없으니 생각하는 꾀도 없으면서 도대체 어떻게 하여 귀한 놈도 만들고 천한 놈도 만들어 내는지 그 놈의 속을 모르겠네요”

“너 술 빚는 법 아느냐?

“예. 누룩에다 술밥 넣고 항아리에 물담아 빚어내지요”

“그렇다. 네 말이 옳다....

.......... 그것이 바로 술항아리속의 천지인물학(天地人物學)이란 것이다. 술을 빚되 누룩이 많이 들어가면 술이 쓴 법이고, 술밥이 많이 들어가면 그 맛이 단법이며, 물이 많으면 술맛이 싱거워지는 법이고, 술항아리에 무턱대고 이불을 뒤집어 씌우면 그 술항아리는 뜨끈뜨끈 해지면서 술맛이 변하기 쉬우나 항아리의 그릇과 누룩과 술밥과 물의 양(量)이 적당하면 이것은 기(氣)가 서로 맞아 그 술맛이 맑고 맛이 좋지만 기(氣)가 서로 맞지 않으면 그 술맛은 빛이 흐리고 술이 술로써 맛을 잃으니 나쁜 술이 되는 것과 같으니라...”

“그럼 저 같은 놈은 탁배기도 못되었으니 애비, 에미의 기(氣)가 맞지 않아 이렇게 종놈이 되었나요?”

“하하하하...

......네 말이 옳다. 하지만 기(氣)와 운(運)은 평생의 동반자와 같고 친한 벗과도 같아 이를 오운육기(五運六氣)라고 하는데 기(氣)가 부족하면 운(運)이 도와주고 운(運)이 부족하면 기(氣)가 도와주면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태어날 때 기(氣)가 부족하여 지금은 하인이 되었다고 하지만 만약 내일이라도 운(運)이 좋으면 너는 상인(商人)도 될 수 있고 주인노릇도 하면서 하인을 거느리며 살 수 있느니라.....

........ 지금 우리 조선의 임금님을 봐도 알 수 있느니라. 지금 이성계 임금은 아버지가 임금이였던 것도 아니고 전쟁터에 나가 싸우는 일개 군인에 불과했느니라. 그런 분이 지금은 만인이 우르러 보는 임금이 되지를 않았느냐. 좋은 운을 만나면 그렇게 되는 것이니라”

“그렇구만요....

..... 참말로 진짜 운(運)이라는 것이 있고 그 운(運)이란 것은 돌고 돌아 나한테도 올 수 있나요”

“운(運)이란 천지(天地) 윤회(輪回)와 같다. 천지가 돌지 않으면 아침에 해가 뜰수도 없고 저녁에 해가 기울 수도 없는 법이오. 오늘이 있을 수 없으며 내일이 있을 수 없으며 너와 내가 여기에 있을 수도 없느니라...”

“대감나으리!...

.... 지금 대감나으리께서 하신 말씀을 참말로 꼭 믿어도 되나요. 저를 놀리시는건 아니겠죠?”

“허허 이놈 봐라. 기(氣)와 운(運)이 돌지 않으면 너는 평생 갓난아기와 같아 크지도 못할 놈이지만 기(氣)와 운(運)이 돌았기 때문에 이만큼 큰 것 아니겠느냐. 하므로 인간사대운(人間事大運)은 돌고 도는 것이며, 세상사(世上事) 모든 것도 낳고 크고 죽는 생노병사(生老病死)의 이치(理致)를 갖고 있으니라. 자 이제 그만 일어나자...”

“대감나으리! 참말로 고맙습니다. 천지도인(天地道人)이 어디에 계신가 했는데 바로 눈 앞에 계신 것도 모르고 있었네요. 천지도인(天地道人)님! 제가 큰 절을 올리겠으니 절을 받고 일어나시지요!...”

하인은 엎드려 정도전 대감에게 넙죽 절하고 일어섰다.

이무렵 평안도 초산(楚山) 고을에 정대운(鄭大雲)이라는 토반이 살고 있었다. 정대운은 문하시중(門下侍中) 정도전(鄭道傳)의 먼 친척되는 사람으로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토지가 많고 더욱 글줄이나 읽은 터여서 이웃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정대감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는 벼슬을 하고 싶은 생각이 있었으나 정도전(鄭道傳)은 그가 관직에 나오는 것을 한사코 반대했기 때문에 벼슬을 하지 못하고 여러 명의 머슴(하인)을 데리고 농사를 지으면서 살았다.

정대감에게는 강만수(姜萬洙)라는 젊은 머슴(하인)이 있었는데 근본이 없는 상사람의 집에서 태어나 무식하기는 하였으나 무척 머리가 영리한 사람이었다.

정대감은 먹고 살 것이 충분하고 몸이 편하고 보니 자연 생각나는 것이 부질없는 것들 뿐이었다. 초산(楚山) 고을에 얼굴이 반반한 여자라면 논마지기나 얼마간 떼어 주고는 사오다시피 하여 데려다 첩실(妾室)을 만든 여자가 자그만치 열 두명이나 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마음에 차지않아 자기 집 머슴인 강만수(姜萬洙)의 마누라 옥매(玉梅)를 빼앗아 볼 욕심을 품게 된 것이 결과적으로 해괴망측한 꼴을 당하게 되었다.

옥매(玉梅)는 얼굴이 유달리 아름다웠던 것은 물론이려니와 몸 맵시 또한 여자다워서 정대감은 아침 저녁으로 눈에 뜨일 때마다 끓어오르는 욕정을 참을 길이 없어 주야로 생각하는 것이 옥매를 품에 보듬어 안을 궁리뿐이었다.

함박눈이 내리거나 이따금 바람마저 모질게 휘몰아치는 어느 겨울 동지 섣달 새벽, 정대감은 자리에서 일어나기가 무섭게 머슴인 강만수를 불러 들였다.

“대감마님, 소인을 불렀습니까?”

강만수가 나타나자 정대감은

“다름이 아니라, 내 나이 이미 육순(六旬)에 몸이 점점 허약해 지는 것 같아서 보약을 달려 먹어야 하겠으니 자네는 오늘 깊은 산중에 들어가서 산딸기 서 말을 따와야 하겠네”

“네. 그렇게 합지요”

머슴 강만수는 공손하게 대답했다.

“다행이 자네가 산딸기 서 말을 따오면 그 수고 값으로 돈 스무 냥을 자네에게 틀림없이 주려나와 만약 따오지 못하면 그 벌로 자네 것을 무엇이든 나에게 넘겨 줘야 하네”

“네. 그리합지요”

“그래, 만약 말일세. 산딸기를 따오지 못하면 자네 마누라도 내가 원하면 내놔야 하네”

속 마음이 엉큼한 정대감이 다짐을 주는 말이었다.

"네, 대감 분부대로 하오리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머슴 강만수는 성큼 대답했다.

정대감은 매우 기뻤다. 자기의 꾀에 머슴 강만수가 넘어가는 것이 고소하고 고분고분 들어주는 것이 여간 마음에 흡족하지가 않았다.

‘역시 종놈은 종놈 생각뿐이지...’

그렇게 생각한 정대감은

“미리 돈을 주지”

생색도 내고 약속을 어김없이 서로 지키자는 뜻에서 돈 스무 냥을 선뜻 내놓았다.

머슴(하인) 강만수는 별로 근심하는 빛도 없이 돈을 받아가지고 나오다가 자기 마누라 옥매에게 귓속말로 몇 마디 일러 주고는 험한 산길을 떠났다.

하루가 지나자 산으로 딸기를 따러 갔던 머슴 강만수가 이른 새벽 느닷없이 돌아왔다.

“대감마님! 지금 돌아왔사옵니다”

“그래, 산딸기는 따왔느냐?”

정대감은 궁금해 물었다.

“사실은 산딸기를 따려고 깊은 산중을 헤매던 중에 한 곳에서 많은 산딸기가 탐스럽게 익어가는 것을 보기는 하였사옵니다..”

“그래서?”

“그런데 난데없이 뱀이 나타나 하마터면 물려 죽을 뻔 하였사옵니다”

“뭣이, 이놈아, 동지 섣달에 뱀이 나타나다니 무슨 소리냐?”

정대감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오면 동지 섣달에 산딸기는 어디에 있다고 대감께서 따오라 하시옵니까?”

‘앗차? 그렇구만...으음....’

정대감이 무릎을 치며 신음을 했다.

하여서는 안될 말을 자기가 먼저 끄집어낸 것이 큰 잘못이었다. 또 사실이 그러하니 별 수 없는 노릇이었다.

다만 오랫동안 애를 써가며 짜낸 자기 꾀가 허사로 돌아간 것이 무엇보다도 분하였다. 더구나 미리 준 돈 스무 냥이 살을 베어준 듯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우겨낼 아무런 트집이 없었다.

입을 도사려 문 정대감은 다른 꾀를 짜내기 위해서 오목 들어간 두 눈을 다시 휘둥거렸다.

겨울이 지나고 따스한 봄이 돌아왔다.

정대감의 맏아들 상진(相眞)이가 과거(科擧)를 보러 한양(漢陽)으로 떠나게 되었다. 당나귀에 돈과 책을 듬뿍 싣고 머슴 강만수가 상진(相眞)을 모시고 한양에 다녀오게 되었는데 아들 상진이 막 떠나려 할 때에 정대감은 아들 상진을 자기 방으로 조용히 불러 이렇게 말했다.

“강만수는 아무리 고쳐 생각해 보아도 내 비위에 거슬려 같이 살 수가 없으니 네가 강만수를 데리고 한양으로 올라가다가 큰 물에 빠뜨려 없애버려라. 그래야만 내가 마음을 놓고 살겠다”

“아버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이렇게 부자지간에 엉큼한 검은 언약이 이루어졌다.

이런 일을 꿈에도 짐작할 까닭이 없는 머슴 강만수는 오랫동안 마누라와 헤어지는 것이 다소 섭섭하기는 했지만 이 나라의 도읍지인 화려하고 찬란한 한양(漢陽) 구경을 하게된 것이 어찌나 좋았던지, 마누라 옥매(玉梅)가 훌쭉훌쭉 우는 것도 뒤돌아보지 않은 채 정대감의 아들 상진(相眞)을 따라 길을 떠났다.

이성계(李成桂)가 나라를 세운 조선(朝鮮)의 도읍지 한양(漢陽) 길은 멀고도 멀었다.

며칠을 두고 끝없이 남쪽으로 뻗은 길을 타박타박 걷고 있는 동안 정대감의 아들 상진(相眞)의 머리에는 과거(科擧)를 보는 것보다 우선 아버지의 분부대로 머슴 강만수를 강물에 빠뜨려 죽이는 문제가 매우 큰 걱정거리여서 종일 입을 굳게 다물고 말이 없었다.

그러나 머슴 강만수는 눈에 보이는 산천 정경이 하나하나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어서 마음 속이 상쾌한 김에 종일 흥겨운 타령이 입에서 흘러 나왔다.

이윽고 안주(安州) 청천강(淸川江)변에 이르렀다.

강을 건너 안주(安州) 고을에 들어가서 주막을 정하더라도 해가 서산에 넘지 않을 터인데 정대감의 아들 상진(相眞)은 무슨 생각에서인지 풍치가 좋다는 핑계로 굳이 강가에서 하룻밤을 자고 가자고 우겨댔다.

아직 봄이라고는 하나, 밤에는 몸에 스며드는 찬바람을 참기 어려운 때였으나 정대감의 아들이 고집하는데는 머리가 영리한 강만수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저녁 밤도 먹지 못하여 배가 고파 시장기가 들었으나 푸른 강물이 세차게 흐르는 언덕에서 하늘에 총총히 뜬 별들을 바라보며 하룻밤을 지내는 것도 뜻 깊은 추억일 것 같아 강만수는 별로 불평을 하지 않고 참았다.

그러나 정대감의 아들 상진(相眞)의 태도가 심상치 않았다.

당나귀는 언덕 위 버드나무에 매어 놓고 책과 돈을 언덕 위에다 쌓아놓게 한 후 자기는 책과 돈이 있는 쪽에 머리를 두고 발을 물 흐르는 쪽으로 향하여 누운 뒤에 말했다.

“너는 내 발 밑에 누워 자거라. 아예 다른 것으로 갈 생각은 하지 말아라. 말하자면 물 흐르는 방향과 같이 가로 누워 자라는 말이다 알겠느냐?”

“예”

대답을 한 머슴 강만수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것이 무슨 깊은 곡절이 있는 듯해서 못이기는 척하며 상진의 방밑에 바싹 눕기는 하였으나 불안한 마음에 잠이 들지 않았다.

얼마가 지난 후에 강만수(姜萬洙)는 가만히 일어나서 상진(相眞)의 머리 위에 쌓여 있는 책과 돈꾸러미를 자기가 누워 자던 상진의 발 밑에 바싹 가깝게 놓고, 자기는 상진(相眞)의 머리맡에 올라가서 자는 척 하고 누워 있었다.

얼마쯤 지났을 때였다. 아니나 다를까 코를 드러렁 드러렁 골며 자던 정대감의 아들 상진(相眞)은

“음.....”

큰 기지개를 켜는 척하면서 자기 발밑에 있는 것을 힘껏 걷어찼다.

“첨벙........”

묵직한 물건이 강물 속으로 떨어지는 소리였다. 다시 조용해지기는 했으나 하늘에서 별이 내려다보고 까르르 웃는 듯했다.

다음날 아침이 되었다.

“엇........

부시시 눈을 뜨고 일어난 정대감의 아들 상진(相眞)은 한참동안 입만 딱 벌린 채 아무 말을 못했다. 분명히 있어야 책과 돈이 없어지고 마땅히 죽어 없어져야 할 머슴(하인) 강만수(姜萬洙)가 머리맡에서 코를 골며 태연히 자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여보게, 강서방, 일어나게, 이게 대체 어찌된 일인가 응?”

“무슨 말씀입니까?”

잠꼬대 같은 머슴 강만수의 퉁명스러운 대답이었다.

“돈과 책 말일세. 그것이 온데간데 없단 말일세”

그제서야 자리에서 일어난 머슴 강만수는 짐짓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간밤에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귀중한 책과 돈을 언덕 위에 놓아두면 도둑을 맞을까 걱정되어 도련님 발밑에 갖다 놓았던 것이온데, 아마도 도련님이 잠결에 발로 그만 물 속에 차 넣은 것이 분명한가 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책과 돈이 없어질 리 없습니다”

상진(相眞)은 생각할 수록 분통이 터지는 일이었다.

책이 없으면 과거(科擧)를 보기 전에 무엇으로 공부하며, 돈이 없으니 아직 수백 리 한양(漢陽) 길을 돈 없이 어찌 간단 말인가. 참으로 난감하고 땅을 치고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다고 머슴 강만수를 나무랄 수도 없어서 상진(相眞)은 당나귀를 타고 안주(安州) 읍내로 힘없이 들어갔다.

간밤에도 요기를 못하였으니, 배고픔을 참기 어려웠다. 상진(相眞)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 주머니에 든 돈이 몇 푼 안되므로 머슴 강만수와 함께 아침 요기를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귀중한 책과 돈을 잃게 한 머슴 강만수을 죽이고 싶도록 미운 터에 밥을 사먹이기는 더욱 싫었다. 이 놈을 어떻게 해서라도 죽이기는 해야 하겠는데 좋은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생각다 못해 주막집이 건너다 보이는 골목에서 상진(相眞)은 당나귀를 멈췄다.

“여보게 강서방, 내 지금 읍내에 살고 있는 친구를 잠시 만나고 올 터이니 자네는 이곳에서당나귀 고삐를 꼭 불들고 기다리되 두 눈을 꼭 감고 있게. 절대로 눈을 뜨서는 안되네”

눈을 감고 있으라는 것은 선비된 처지에 혼자만 밥을 사먹는 것이 겸연쩍어서 그렇게 시킨 것이다.

“네. 그러합지요”

강만수(姜萬洙)는 당나귀 고삐를 한 손에 붙들고 눈을 감았다.

상진(相眞)은 안심이 된다는 듯이 주막집을 향해 걸어갔다. 그 속셈을 눈치 챈 강만수가 살그머니 눈을 떠 보니, 과연 대감의 아들 상진(相眞)이 혼자 주막집으로 가는 것이 아닌가.

“혼자 밥을 먹겠다는 속셈이구만, 그렇다면 나도 생각이 있다”

당나귀 고삐를 붙들고 사방을 휘돌아보고 있으니까 마침 점잖아 보이는 노인 한 분이 지나가는 것이었다.

“여보슈 노인장”

“왜 그러슈?”

노인은 매우 의아스러운 눈치로 강만수 앞에서 발을 멈추었다.

“저는 평안도 사람으로 한양에 가는 도중에 그만 노자가 떨어져 할 수 없이 이 당나귀를 파는 것이니 아주 싼 값으로 사가시오”

“얼마에 팔겠소?”

“열 냥만 주시오”

“열 냥이라?”

“그렇소”

열 냥이라면 싼값이었다. 아무리 헐값에 팔아도 스무 냥짜리는 족히 될 짐승이었다. 노인은 두말없이 돈 열 냥을 선뜻 강만수(姜萬洙)의 손에 쥐어 주었다.

“그런데 노인장, 이 당나귀 고삐를 한 뼘 만큼만 잘라 주시오”

“그건 무엇에 쓰시려우?”

“팔기가 아까워 그럽니다”

노인이 보아하니 과연 애석해 하는 것 같았다. 더구나 고삐 쯤이야 짧아도 상관이 없지를 않는가. 그까짓 고삐는 새것으로 바꾸면 될 것이라고 생각한 노인은 허리춤에서 칼을 꺼내어 당나귀 고삐를 한 뼘 정도 잘라서 강만수에게 주고는 당나귀를 끌고 어디론가 바삐 가버렸다.

강만수(姜萬洙)가 돈 열 냥을 허리춤에 간직하고는 한 뼘 정도 되는 당나귀 고삐를 손에 쥐고 눈을 감고 태연히 서 있었다. 그러자 대감 아들 상진(相眞)이 얼굴이 빨갛게 된 채 주막집을 나와 이쪽을 향해 급히 걸어오는 것이었다.

“아니 여보게 당나귀는?”

“여기 있습니다”

강만수는 눈을 감은 채 고삐 쥔 손을 내밀었다.

“여기 있다니 당나귀가 없단 말이야”

“여기 있지 않습니까?”

강만수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태연스럽게 고삐만을 쥔 손을 상진(相眞)의 코밑까지 내밀었다.“눈을 뜨고 똑똑히 봐!”

상진(相眞)은 화가 난듯 소리를 질렀다.

그제야 눈을 뜬 강만수는 짐짓 놀라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기랄, 어떤 못된 놈이 고삐만 자르고 당나귀를 훔쳐 갔군요. 도련님이 공연히 눈을 감고 있으라고 해서 이 꼴을 당했습니다. 내 참...이럴 수가....”

강만수(姜萬洙)는 능청스럽게 투덜거렸다.

상진(相眞)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 정말 기가 막히는 일이었다. 분한 일이 한 두가지가 아니였다. 하지만 당장 죽여버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한양(漢陽)까지 이대로 데리고 동행할 수도 없었다. 만약 같이 가다가는 이보다 더 큰 화를 당할 지도 모를 일이었다.

생각다 못해 강만수를 그냥 집으로 되돌려 보내기로 했다.

“네 이놈, 보자하니 네가 나를 골탕 먹일 잔꾀를 부리는 모양인데, 너의 잔꾀가 어디까지 가는지 어디 한번 두고 보자. 당장 몰고를 내버리고 싶지만 종놈의 신세로 초로(草露) 같은 인생을 가엾이 여겨 이대로 돌려보내는 것이니 너는 이 길로 곧장 집으로 내려 가거라”

“그러나 도련님 혼자서 어떻게 한양으로 가시렵니까?”

“어찌 가던 내 걱정은 말아라”

정대감의 아들 상진(相眞)은 강만수를 먼저 돌려보내게 된 사연을 자세히 적어 부친께 전하려고 지필(紙筆)을 꺼내 쓰려다가 문득 생각하니 강만수가 이것을 가지고 내려가다가 무슨 잔꾀를 부릴지 알 수 없기에 잠시 생각한 끝에 이렇게 말했다.

“네 이놈, 저고리를 벗고 뒤로 돌아서거라”

강만수가 장난을 치지 못하도록 손이 미치지 않는 잔등에 쓰기 위해서였다.

“네”

강만수는 저고리를 벗고 돌아섰다. 상진(相眞)은 붓에 먹을 듬뿍 찍어 강만수의 등에 다음과 같이 썼다.

- 前略, 강만수 이놈으로 인해서 잃지 않을 책과 돈을 잃고, 잃지 않을 당나귀마저 잃었사오니 집에 돌아가거든 즉시로 하인을 시켜 죽여 없애도록 하옵소서. 小子 相眞 上書 -

쓰기를 마친 상진(相眞)은 다시 강만수에게 엄히 말했다.

“집에 돌아가거든 곧 대감을 뵈옵고 네 등에 쓴 글을 보여드려라. 알겠느냐?”

“예, 꼭 그리합지요”

이리하여 정대감 아들 상진(相眞)은 한양길로 떠나고 머슴 강만수는 집을 향하여 떠났다.

강만수는 한양 구경을 못하게 된 것이 여간 원통한 일이 아니었으나 별도리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올라올 때보다는 가벼운 걸음으로 내려가는 동안에 웬지 등에 써준 글이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를 좋게 칭찬한 글이 아님은 분명해 보였다.

사방을 두리번거리면서 행인 중에 선비나 글줄이나 읽을 만한 사람을 찾던 강만수(姜萬洙)는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자기 쪽으로 향해 오는 스님 한 분을 만나게 되었다.

스님은 글을 알겠지 생각하고는 다짜고짜로 스님 앞으로 다가가서 두 손을 모아 합장하며 말했다.“스님, 청이 하나 있습니다”

“무슨 청인지 말해보시오”

스님은 공손히 대답했다.

“이것 좀 봐 주십시오”

강만수는 윗저고리를 벗고 등을 보였다.

등을 본 스님은

“댁을 죽여 없애라는 글이외다”

“그러면 돈 닷 냥을 부처님께 공양할 것이니 이 글을 지우시고 대신 소인이 불러드리는 대로 고쳐 써 주십시오 스님”

“그리 하옵지요”

스님이 먹과 붓을 준비하자 강만수는 입을 열었다.

“전략, 강만수로 인해서 잃을 책과 돈을 얻었으며, 자칫 잃을 뻔한 당나귀를 얻었으니 집에 돌아가는 즉시 기와집 한 채와 논밭을 주어 잘 살게 하여 주옵소서. 소자 상진 상서 이렇게 써 주십시오”

“그렇게 쓰겠습니다”

잠시동안 빙글 웃으면서 등을 돌려댔던 강만수는 스님이 글씨 쓰기를 마치자 몇 번이고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스님과 헤어진 후부터 강만수는 기분이 좋아 뛰다시피 하여 발걸음을 재촉했다.

십여 일 후 집으로 돌아온 강만수는 곧장 안으로 들어가서 정대감을 찾아 뵈였다.

“대감마님! 지금 돌아왔사옵니다”

“네가 먼저 웬 일이냐?”

“이걸 보시면 아실 일이옵니다”

다짜고짜로 저고리를 벗고 등을 정대감 앞에 불쑥 내밀었다.

“뭣이? 책과 돈을 얻고 당나귀를 얻었으니 집과 논밭을 주라고.....”

청천벽력 같은 말이었다. 마땅히 죽었으리라 믿고 일간 강만수의 마누라 옥매를 소실로 맞아들이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집과 논밭을 주라니, 정대감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찌된 일이냐고 묻고 싶었으나 꾹 참았다. 물어 본들 거짓으로 보태면 보태었지 사실 여부를 알기 어렵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들의 말대로 큰 공을 세웠다는 데야 별 수 없었다.

이날로 정대감은 강만수에게 큰 기와집 한 채와 먹고 남을 만한 논밭을 주었다.

그해 여름이었다. 한양(漢陽)에 갔던 상진(相眞)이 과거(科擧)에 낙방하고 돌아와보니 집 옆의 큰 기와집에 하인 강만수가 살고 있는데 사연을 알아 보았더니 뜻밖에도 기가 막혔다.

곧 부친께 말씀드리고 힘깨나 쓰는 하인들을 시켜 강만수를 잡아다가 오랏줄로 꽁꽁 묶은 뒤에 두겹으로 된 무명자루에다 집어 넣고 주둥이를 꽉 막아 안에서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어서 이것을 앞산 밑에 있는 큰 연못에 집어 넣어라”

정대감의 아들 상진(相眞)의 분노는 상투끝까지 차 올랐다.

“네”

하인들은 강만수를 넣은 자루를 메고 앞산 밑 연못가로 갔다. 강만수는 이제야 별도리 없이 죽었다고 생각했다. 마누라 옥매의 얼굴을 한번 더 보고 싶었으나 어림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큰 연못가에 당도한 하인들은 자루를 내려놓고 난처한 얼굴로 서로 말을 주고 받았다.

“여보게, 사실 말이지 강만수야 우리와 같은 종놈인데 무슨 죄가 있나. 이것은 다 정대감의 부질없는 생각에서 생사람을 죽이자는 거지 뭔가? 정대감댁 도련님이 시키는 일이니 거역할 수가 없어 여기까지 메고는 왔네만 차마 물 속에 던질 수야 없는 것 아니겠나? 그러니 우리 저 버드나무 가지에 이 자루를 매달아 놓고 돌아가세”

“그것이 좋겠구만. 그리하세”

천만다행한 일이었다.

하인들은 연못가 버드나무 가지에 자루를 매달아 놓고는 그대로 돌아가 버렸다.

그렇지만 강만수가 살아나갈 길은 아직 막연했다. 자꾸만 마누라가 보고 싶었다. 감은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양볼을 적시면서 계속 흘러내렸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나야만 했다. 이리저리 골몰히 생각하고 있을 때, 마침 사람 하나가 버드나무 밑으로 지나가는데, 지팡이 소리가 나고 발자국 소리가 고르지 못한 것이 필시 장님이 틀림 없는 것 같았다.

바로 이때 강만수(姜萬洙)의 머리에 묘안이 떠올랐다.

“네 눈 깜깜.. 내 눈 번뜩.. 네 눈 깜깜.. 내 눈 번뜩...”

“네 눈 깜깜.. 내 눈 번뜩.. 네 눈 깜깜 내 눈 번뜩... ”

마치 염불 외듯 크게 외우기 시작했다.

지나가던 장님이 발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생각하지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네 눈 깜깜이고 내 눈 번뜩이라.. 이게 무슨 소린지 궁금하니 한 번 물어보자”

장님은 이렇게 중얼거리며 크게 소리쳤다.

“여보시오”

“왜 그러시오”

강만수(姜萬洙)는 귀찮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곳에서 무엇을 하고 계시오?”

“눈뜨고 있소”

“댁도 장님이오?”

“그렇소”

“나도 눈 좀 뜨게 해주시오”

“안되오, 눈을 뜨기 위해서 초가삼간을 다 팔아서 이것을 사가지고 이 속에 들어앉아 이 주문(呪文)을 외우는 것이 벌써 아흐레째가 되어, 이제는 눈이 거의 다 떠서 앞을 환히 보게 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댁이 누구시라고 눈을 뜨게 해드리겠소.. 왠 미친놈 다 봤군. 네 눈 깜깜.. 내 눈 번뜩.. 네 눈 깜깜.. 내 눈 번뜩....”

강만수는 더욱 용기가 솟아올라 더 큰 목소리로 주문(呪文)을 외웠다.

그러자 장님은 애가 달아올랐다. 과연 강만수가 생각했던 대로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버드나무 밑을 이리저리 헤매었다.

“여보슈, 보아하니 젊으신 분 같은데 당신의 눈이 다 뜨거든 그 보물을 나에게 팔 수 없소? 쉰 냥을 드리리다”

장님은 애원하듯 간청했다.

“정 그러시다면 할 수 없이 들어드릴 수밖에 없군요. 사실은 나도 눈을 뜨면 이것은 소용없게 되니 이왕이면 당신 같은 사람에게 드리겠소”

못이기는 척하면서 강만수는 승낙했다.

“고맙소이다, 은혜는 잊지 않겠소이다”

한사코 치사하는 장님의 도움을 받아 자루에서 무사히 빠져 나오게 된 강만수는 매우 측은한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모처럼 눈 뜨기를 갈망하는 장님의 소원을 묵살해 버리기가 안쓰러워 우선 장님을 자루에 넣고 버드나무 가지에 매달아 놓았다.

“여보, 장님! 쉰 냥은 이 다음에 주시오”

“고맙소이다”

다시 없는 적선을 베푸는 것 같아 한마디 내뱉고는 곧장 이웃 고을 주막으로 향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죽은 줄만 알았던 강만수가 불쑥 정대감 앞에 나타났다.

“대감마님의 높으신 은혜는 소인 백골난망이옵니다. 대감마님께서 염려하신 덕분으로 용궁(龍宮)에서 후한 대접을 받고 돌아 왔습니다”

하면서 넙죽이 큰절을 세 번 했다.

“아니 용궁에서 후한 대접을 받고 돌아왔다니 그것이 사실이란 말이냐?”

“대감마님께서 소인을 자루에 넣어 연못에 던지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그래서 저는 물속 용궁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소인이 거짓으로 아뢸 까닭이 있사옵니까. 모두 사실이옵니다”

“그러면 어째서 벌써 돌아왔느냐?”

정대감이 기다시피 무릎 걸음으로 바싹 강만수 앞에 다가앉았다.

“다름이 아니오라 소인은 오랫동안 대감마님의 높으신 은혜를 입고도 은혜를 갚을 길이 막연하여 항상 송구스럽기 짝이 없었사온데 이번에 용궁(龍宮)에서 꽃같이 아름다운 궁녀들로부터 밤낮으로 극진한 대접을 받고 보니 대감마님과 도련님 생각이 더욱 간절하옵기에 특별히 용왕님의 윤허를 얻어 이같이 대감마님을 모시려 온 것입니다”

“그래. 기특도 하고 착하기도 하지, 그러면 언제 용궁으로 찾아가는 것이 좋을까? 말해 보게”

“내일 진시(辰時)에 가기로 용왕님과 안약이 되었사오니 이 때를 놓치지 마시옵소서”

“그리하마”

벌어진 정대감의 입속에 뿌연 침이 담북 고였다.

“그리고 대감마님, 다시 없는 기회이오니 이참에 온 가족을 모두 함께 데리고 떠나심이 어떠하오리까?”

“그것 참 더욱 좋지”

“그리고 또 한가지..

“뭐냐?”

“용궁에는 이 세상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 있사온데, 다만 한 가지가 없사옵니다”

“그것이 뭐냐?”

“맷돌이 옵니다. 맷돌이 없어 곡식을 갈려고 해도 갈수가 없으니 잔치를 차릴적마다 퍽 불편을 느끼는가 보옵니다. 그러하오니 맷돌을 많이 마련하시어 한 짝씩 지고 가시면 좋을 듯 하옵니다”

“그거야 어렵지 않지, 하기야 용왕님한데 찾아 가는데 빈손으로 갈 수 있겠느냐?”

정대감은 모든 하인(下人)을 시켜 이날 안으로 어른, 아이들을 막론하고 한 짝씩 지고 갈 수 있도록 크고 작은 맷돌을 마련하게 하였다.

이튿날 아침 정대감 댁의 가족과 강만수(姜萬洙) 내외는 모조리 무거운 맷돌 한 짝씩을 지고 시간(辰時)에 늦지 않도록 열을 지어 앞산 밑 연못가에 이르렀다.

“도련님께서 먼저 들어가십시오”

“그러면 내 먼저 갈 테니 뒤에서 아버님을 모시고 오게”

첨벙하는 소리와 함께 대감 아들 상진(相眞)이 물 속으로 뛰어 들었다.

등에 돌로 만든 무거운 맷돌을 지었으니, 물에 뛰어들기가 무섭게 물위로 떠오르지 않고 물속으로 자취를 감춰버렸다.

“저것 보십시오. 하도 좋으시니까 도련님께서 얼른 뛰어가시지 않습니까?”

“그런가 보구나”

정대감이 앞에 나섰다.

“대감마님께서도 어서 들어가십시오”

“응, 곧 뒤따라 오게”

정대감이 맷돌을 진 채 물 속에 첨벙 뛰어 들었다. 다음은 며느리, 손자 손녀 할 것 없이 모조리 물 속에 뛰어 들었다.

이렇게 해서 정대감 가족은 모두 물귀신이 되었다. 끝으로 강만수(姜萬洙)의 마누라 옥매(玉梅)의 차례였다.

옥매가 막 물속으로 뛰어들려고 할 때

“여보, 정신이 있소 없소 ? 물에 뛰어 들다니....”

강만수는 짊어진 맷돌을 벗어 던지면서 마누라 옥매를 꼭 불잡았다.

“어서 집으로 돌아갑시다. 정대감 가족을 죽일려고 내가 꾸민 일이오”

“어머. 그래요”

마누라 옥매(玉梅)와 같이 돌아오는 길에 강만수(姜萬洙)는 아직도 버드나무 가지에 매달려 있는 가엾은 장님을 구해내어 돈 몇 냥을 주고 사례를 한 후 돌려 보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즉시 열 두명의 정대감 첩실을 모아 놓고 이렇게 말했다.

“이제 정대감은 용궁으로 가셨으니 다시는 이 땅에 돌아오지 못할 것이오. 그래서 장대감의 논밭을 얼마씩 나누어 줄터이니 각자 집으로 돌아가 이제 마음 놓고 살아보세”

하고는 정대감의 첩실(妾室)들에게 얼마씩 논밭을 떼어 주었다.

강만수(姜萬洙)는 싱글벙글 웃으며 마누라 옥매(玉梅)를 두 팔로 힘껏 끌어 안았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이 나라에서 임금 다음으로 권세를 가진 분은 문하시중 정도전 대감이오. 정도전 대감은 내가 죽인 정대감의 친척이라 이 사실이 밝혀지면 나를 참형이 처할 것이 분명하오. 그러니 논밭을 팔아 정리하고 멀리 남쪽으로 떠납시다”

옥매(玉梅)는 고개를 끄떡이었다. 강만수(姜萬洙)는 집과 논밭을 팔고는 당나귀에 몸을 싣고 마누라와 함께 경상도 남쪽을 향해 먼 길을 떠났다.

(尾)

- 아무리 돈이 없고 신분이 천한 사람이라도 사람은 생각하며 사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돈이나 권세로 사람의 생각을 꺾어 욕망을 달성하겠다는 것은 미련한 행동인 것이다.

권우상 기자 lsh8589@hanmail.net
< 저작권자 © 구미일보 ,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 구미일보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ㆍ복사ㆍ배포 등을 금합니다.

PC버전으로 보기

사업장주소 : 경북 구미시 상사동로 167-1, 107호(사곡동) Fax. (054)975-8523 | H.P 010-3431-7713 | E-mail : kgnews@hanmail.net 발행인 : 이안성 | 편집인 : 이안성 | 청소년 보호책임자 :김창섭 | 등록번호 : 경북 아 00052 | 신문등록일 : 2007년 8월 7일 Copyright ⓒ 2009 구미일보 All rights reserved.